우리 모두의 인생 밥집,
‘강민주의 들밥’
헉--;;; 내가 이리 칼을 잘 다루다니!
고등학교 가정 실습시간이었어요. 선생님이 달걀지단을 가르쳐 주셨는데, 제가 선생님보다 칼질을 더 잘하는 겁니다. 무채, 당근 채를 신들린 듯 빠르고 고르게 썰어내는데, 저 자신도 놀랄 정도였어요. ‘내가 이리 칼을 잘 다루다니!’ 저희 집안엔 특별히 요리 잘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말이죠.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주말이 되면 도너츠, 빵, 고로케 등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어 인기를 얻기도 했지요. 그리고 20대 아가씨 시절에는 안동에서 서울로 올라와 오빠, 남동생과 자취를 하면서 식사를 담당해야 했는데, 서점에 가도 패션 잡지보다 요리책에 손이 갔죠. 이상한 것은 음식 하는 게 싫거나 힘들거나 짜증나지 않고 재밌더라고요.
얼떨결에 시작한 식당?
경기도 이천에서 살게 되면서 사찰에 들어가 잠시 음식을 배울 기회가 있었어요. 음식 하나하나를 정성껏 배우니 아주 재밌더라고요. 저의 음식 솜씨를 보고 스님이 식당 이름, 메뉴 등 가게의 컨셉을 정해주셨죠. 그러면서 얼떨결에 바로 이 자리에서 2000년도에 식당을 시작했습니다. 음식점을 한다는 것은 저와 거리가 먼 세상인 줄 알았죠. 그런데 처음 시작한 식당이 의외로 잘 되었습니다.
무조건 친절, 틈새밥집
그 당시 5천 원짜리 비빔밥과 제육, 편육 세 가지로 메뉴를 정하고 무조건 친절하게 손님을 맞았습니다. 이천은 지리적 특성상 여름에는 골프장, 겨울에는 스키장이 있어 상권이 좋았습니다. 소문도 빨리 났지만, 저 또한 여기저기 알리느라 남모르게 고생을 많이 했어요. 이천은 보통 쌀밥 정식 위주의 고깃집, 닭백숙집 등이 많았는데, 우리 가게는 5천 원으로 그냥 쉽게, 넉넉하게, 편하게 먹을 수 있는 틈새 밥집이었던 거죠. 8년 정도 손님이 많았습니다.

시대에 맞는 아이템과 확실한 서비스로 문제를 해결하다
틈새 밥집으로 시작은 했지만, 손님들을 너무 기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새롭게 가게를 리모델링하고 가격도, 메뉴도 돌솥밥으로 통일해 두 달 만에 오픈했습니다. 우리 가게에서 보리밥 먹는 사람은 통계를 내보니 20%를 차지하더군요. 그중 10%는 당뇨환자, 10%는 기호로 먹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아예 보리밥을 그냥 모두에게 드리자고 결정했습니다.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한다면 제대로 하자는 마음으로 이리 결정을 한 것이죠. 보리밥을 큰 솥에 담아 먹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먹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예전 메뉴를 생각하면서 '보리밥이 있네, 없네' 하던 불만 고객도 사라졌어요. 막상 이렇게 운영해보니 보리밥이 메뉴에 있을 때 3솥을 했다면, 서비스로 드리니 2솥이면 끝나더군요. 무엇보다 메뉴가 돌솥밥으로 통일되어 상도 빨리 나가고 기다리는 사람도 줄어들게 되었죠.
3억을 들여 최고의 메뉴를 개발하다
손님들이 저희 가게에 오려면 모두 차로 오시는데, 뭔가 특별한 메뉴를 개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이 굳이 제육볶음이나 고등어를 드시러 오지는 않으니까요. “제대로 와서 드시고 가게 하려면, 보리굴비와 간장게장으로 가면 어떨까? GO!” '보리굴비'는 제가 직접 개발했고, '간장게장'은 잔작으로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만들었어요. 지금도 그 친구를 생각하면 정말 고마울 뿐입니다. 보리굴비는 ‘처음 먹어도 바로 먹을 수 있는 맛으로 만들자’는 발상을 했습니다. 이를 위해 수도 없이 찌고 담그기를 반복했고, 냄새나지 않게 울금을 넣고 시도하면서, 귀한 굴비를 얼마나 많이 버렸는지 몰라요. 자그마치 3억을 들여 드디어 지금의 맛깔을 나게 했습어요! 이런 노력 가운데 메뉴가 고품격으로 완벽히 준비되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한 끼 때우는 식사가 아니라, 한 끼를 드시더라도 제대로 드시도록 하자로 바꾼 것이죠. 그냥 쉽게 먹는 밥이 아닌, 정성으로 누군가를 대접할 수 있는 집으로 말이죠.

직원에게 월급 주는 사람은 누구?
직원들 면접을 할 때 월급을 누가 주느냐? 물어보면 “사장님이요!”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대답입니다. "저는 단지 고객의 돈을 받아 월급을 주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 사장에게 잘 보이려 하지 말고 손님에게 잘 하세요!" 라고 하죠. 아주 간단하죠. 무엇보다 각자의 역할을 잘 해야 하는데, 음식을 만들고 간을 잘 봐야 하는 일이라면 손님의 입맛을 생각해야 하고, 홀에서 손님에게 서빙을 하는 일이리면 손님에게 맞게 서비스를 잘 해야 하는 거죠. 그래야 손님도 만족하고, 그들의 돈을 받는 우리도 떳떳한 마음으로 만족할 수 있으니까요. 저의 일은 손님들에게 단 한가지의 불평이라도 나오지 않게 하자는 겁입니다. 여기에 직원 중에는 외국인들도 있으니, 제가 세심하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반찬도 손님은 더 달라 할 수 있는데 뒤 돌아서면 잊어버릴 수 있어서, 테이블에 앉으시면 바로 저희가 반찬을 차려주지만 추가 반찬은 손님들이 먹고 싶은 만큼 드실 수 있도록 셀프바를 해놓았습니다. 추가 반찬을 계속 서빙해야 하는 일은, 저도 두세 번 왔다 갔다 하며 겪어 봤지만 정말 힘든 일입니다. 직원들은 하루에 10번을 넘어 100번을 오고가야 하는데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서 추가 반찬 셀프바를 만든 것이죠. 돈이 많이 들어도 참 잘 했다는 생각합니다. 손님도 편하고 직원도 필요 이상의 많은 노동을 하지 않으니까요. 이제는 주문도 직접 받는 것이 아닌, 테이블에 정보를 올려 주고 눌러서 주문하는 시스템으로 바꾸려고 하는데 거의 만들어 가고 있어요.

직원들을 위한 세심한 투자들, 감사로 돌아오다
직원들이 저희 가게를 진정한 직장이라고 생각하고 다닐 수 있도록 저는 최선을 다합니다. 저희는 영업이 7시면 끝나는데, 시내에 개인적인 볼일 보러 나갈 수 있는 시간이라 좋아합니다. 직원들은 20명 정도로 숙소도 따로 마련되어 있고요. 또 직원을 위해 주방에도 많이 투자했습니다. 예를 들면, 주방에 가면 부추와 두부 썰 때 외에는 칼이 필요 없습니다. 모든 게 기계화가 되어 직원들이 칼질하는 시간을 아예 없앤 겁니다. 예전에는 쉬는 시간에 다같이 앉아 2시간씩 무채뿐 아니라 야채들을 썰어야 했죠. 이게 만만치 않게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이젠 가지, 무, 파, 청양고추 등은 야채 써는 기계와 감자 깎는 기계를 사용하면 10분이면 끝납니다. 특히 시골이라도 우리 가게는 주방 환경이 깨끗합니다. 음식물 처리하는 기계를 5천만원 들여 설비했습니다. 제가 15년 정도 계속 일본을 오가며 연수 교육을 받아서 이런 부분은 그 누구보다 빨리 시도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직원들의 잔일을 덜어주고, 한 가지라도 덜 힘들게 하고 덜 옮기게 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호텔 같은 경우에도 주방 에어컨이 위에서 한군데 정도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각각 조리하는 사람들 머리 위에서 에어컨이 나오도록 했어요. 추울 정도로 말이죠. 반찬하는 사람과 밥하는 사람 머리 위에서 바로 에어컨이 나옵니다. 그래서 주방이 시원합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면 고맙다고 카톡으로 하트를 보내오곤 하는데 매우 기쁘죠. 젊은 직원들도 잘 하지만, 나이든 직원들의 노련함은 못 따라 갑니다. 밥하는 노련한 직원이 쉬는 날이면 젊은 이들 2명이 붙어서 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직원은 혼자서 800~900개를 거뜬히 해냅니다. 도리어 한명을 붙여주면 걸치적 거린다며 혼자 한다며 우기기도 하니까요.
언제나 찾아 올수 있는 인생 밥집
어느 날은 돌아가신 부모님이 너무 사랑했던 밥집이라면서 부모님 생각이 난다고 저희 밥집을 찾아온 분이 있었어요. 이렇게 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이 나를 울려. 맨날 울려!”(헉--;;; 진짜 이 말씀을 하시며 강민주 대표님의 눈에 눈물이 고였어요) 심지어 부모님이 돌아가시며 저희 가게를 잊지 말라는 유언으로 편지를 썼다고 하는 분들이 같은 사장님이 계속 일하고 계셔서 고맙다고 반응해주는 손님들이 많습니다. 이전에는 명절에도 밥집을 열어 손님들이 아이들을 데려오면 새 돈으로 준비해서 쪼막손에 천 원씩 쥐어주었어요. 그런 아이들이 이제는 장성해 찾아와 사장님에게 그 천 원 받은 게 기억난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 들으면 ‘아! 그래도 내가 잘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환자분들은 아산병원에 오는 날이 너무 행복하다고 하세요. 왜냐면 우리 가게에 와서 밥을 먹고 갈 수 있으니까요. (이런 분들은 진심으로 오는 거잖아요) 저희 가게에 아직 와보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온 사람들은 없어요! 30%가 충성고객이거든요. 이 충성고객들이 저에게 보낸 어록들을 다 뽑아 보니 공통적인 것이 18개가 되더군요. 그중 “사장님! 그냥 믿어요”가 제일 생각이 납니다. 저는 이런 손님들한테 뭘 해드릴까?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 자리를 굳굳하게 지키고 저 손님들이 제가 있음으로 마음 편하게, 안심하고 먹고 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더군요. 그 중심 역할을 사장인 내가 해야 되는 것이죠.
한식 세계화? 기본부터 다시 세워야!
예전에는 된장, 고추장, 간장을 제가 다 담았지만, 이젠 포항에서 담아 올려옵니다. 재래식 된장이 들어가야 음식에 고유의 맛이 나거든요. 마지막 남은 한식 밥집이라 생각하고 정성을 다하는 거죠. 하지만 이제 저도 나이가 먹어가도, 직접 장을 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직원은 받쳐주지 않으니 마음뿐인 겁니다. 이게 가장 슬픈 일이에요! 무엇보다 한식의 세계화에 있어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초적의 부족에 있다고 봅니다. 현재 학교에서도 이것을 제대로 가르치는 스승이 없습니다. 저는 학생들이 중학교 때부터 항아리를 갖다 놓고 3년 정도 직접 장 뿐 아니라 한식에 대해 명확히 배운 후, 기본이 탄탄해진 학생들이 한식에 대한 본격적인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의 세프들에게 된장, 고추장, 간장의 쓰임새를 물어보면, 아는 사람들이 몇 명 없습니다. 만약 시험을 친다면 30~50점 정도 나올까 말까죠. 이런 기본조차 되어 있지 않는다면, 한식 세계화라고 말은 껍데기일 뿐이죠. 해외에 나갔을 때 “너희 나라 소스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스파게티에 간장을 넣으면 어떤 맛이 나고, 고추장을 넣었을 때, 된장을 넣었을 때 어떤 맛이 나는지를 구별하며, 각각의 맛을 자세히 소개하며 이런 발효의 맛을 내기 위해 오랜 동안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너희 서양의 레시피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을 정확히 이야기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한식에서 가장 기본인 된장, 고추장, 간장도 모르니, 한식 세계화가 제대로 될 턱이 없죠. 무엇보다 장인 수준의 60~70대 어르신들에게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어린 학생들에게 올바르고 깊은 전통이 전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려면 무조건 자격증이 있어야 하니, 이런 장인들은 전수해줄 기회조차도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죠. 특히 우리나라는 한식을 한다면 우습게보고 양식을 하면 대접해주는 외세의존성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식자격증을 먼저 따고 그 양식, 일식, 중식을 차례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요리연구가 황지희 선생으로부터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새로운 메뉴 개발과 자문을 받고 있어요. 우리의 전통 음식은 이어가되, 현대인의 입맛에 맞춰 짜지 않게 레시피를 개발해야 하거든요. 현재에 만족하고 안주하면 도태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죠. 계속 연구 개발해야 어려운 한식이 살아남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최근에 책을 하나 냈어요.《강민주의 사계절 들밥 반찬》이라는 책인데 지금까지의 발자취가 담긴 요리책입니다. 후배들에게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었습니다.

외모도 자기관리 능력이다
저는 손님들에게 힘들게 보이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하며 제 얼굴과 표정을 가꿉니다. 단순히 젊어 보이려 한다기보다, 손님들을 대하는 제 마음이 제 얼굴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막 찌들어 있거나 힘든 표정을 짓는다면 ‘저 사장님 힘든가 보다’해서 도리어 오시는 손님의 마음이 우울해 질것 같아요. 외모도 때론 자기관리를 잘하는 능력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는 장례식에 가는 게 힘들어요. (왜요?) 장례식에 가서도 웃을까봐… (웃음) 저 뿐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서 가게 간판도, 메뉴도, 음식도 늙었다면, 총체적으로 관리가 잘 안 된 경우겠죠? 이렇게 자기 관리를 하지 않은 나이든 사람의 음식이 뭐가 맛있겠나는 생각에 나 자신부터 건강하게 자기 관리를 하자! 라고 마음을 먹었답니다. 손님들은 이런 저를 보며 “사장님! 어쩜 그리 똑같으세요!”라고 반가운 반응을 해줍니다.
그냥 이룬 성공이 아닌, 목숨 건 절박함!!
제가 처음 이곳에 자리 잡게 될 때 어느 정도 장사가 되는 듯 보이니, 여러 모로 방해하는 사람들도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절박했어요. 나를 모함하는 이 어려움과 난관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냥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정말 죽는다는 생각으로 목숨걸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온 게 그냥 된 것은 아니라는 거죠.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 자기도 장사를 하고 싶다고 하길래, 저의 첫 마디는 “너, 머리 밀 자신 있냐?”였습니다. 그래도 참 이상한 것은 예전에 힘들었던 게 생각이 안 난다는 겁니다. 잊어버리게 되더군요. 그냥 난 운이 참 좋았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진짜 ‘행복한 사람’
매일 똑같은 일의 반복이지만, 만나는 사람은 매일 다르잖아요. 저는 지금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아요. 이리 당당하고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온 저에게 눈만 뜨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이유는 저희 집에 오는 사람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으면 밥을 먹으러 오겠어요? 마음을 풀고자 오고, 마음을 나누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밥을 맛있게 먹고 나에게 돈을 주고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하고 가는데 행복할 수밖에 없는 거죠. 의사는 맨날 아픈 사람만 보고, 판사는 맨날 죄 지은 사람만 보는데 비하면 나는 진짜 행복한 사람이죠(웃음).
20년을 넘게 한자리에서 손님들의 밥에 집중하느라, 가장 가까이 있는 아들에게는 밥 한 끼조차 못해주었다는 강민주 대표. 아들 입학식, 운동회. 졸업식 등에 한 번도 참석을 못했다며, 이제 아들에게 밥 한 끼 제대로 해주어야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하면서요. 그만큼 일에 몰입했다는 거죠. 그리고 지금 있는 공간을 더 넓히고 새롭게 해서 더 많은 가족들이 올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 있다고 했습니다. 요즘 서울의 한식당들도 점차 없어지고 있는데, 이곳을 ‘한식의 마지막 밥집’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운영하고 있는데,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코로나 기간에 <식객허영만의 백반기행>에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건강한 밥집으로 소개되어 도리어 코로나특수를 누리게 되었답니다. 지금은 본점과 몇 곳의 직영점도 운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모쪼록 이곳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인생 밥집이 되길 바라며, 음식의 메뉴, 간판 등은 유사하게 사용 할 수 있지만, ‘강민주의 들밥’이 가진 긴 역사와 후덕한 주인장의 마음은 결코 따라 갈수 없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강민주의 들밥> 대표
사찰음식부터 한정식, 고깃집까지 다양한 한식을 경험하고
직접 요리하면서 강민주만의 한식 밥상인 ‘들밥’을 만들었다.
특별한 재료와 조리법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서 배우고
직접 만들어보고 강민주 스타일로 발전시켰다.
전용 양념가방을 트렁크에 실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전용 프라이팬과 냄비까지 실고 다닐 정도로
메뉴 개발에 열정적이다.
최근 강민주는 여러 대가들에게 김치와 장류를 배우며
강민주 스타일의 김치와 새로운 메뉴 개발을 위해 고군분투중이다.
아마, 조만간 그 노력의 결실을 <강민주의 들밥> 고객들이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7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