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되어 ‘미니밤호박’과
함께 떠난 2023년 첫 봄, 여름 여행
미국 뉴욕에서 7년을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겠다고 했을 때 친환경농사 경력이 20년 넘은 지인이 한 말이 기억납니다.
“정말 농사를 지을 겁니까?”
“농사를 지으려면 먼저 사람이 되야만 합니다.”^^
“귀농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진 농사에 대한 고상한 철학이나 가치, 꿈은 잠시 접어두고 먼저 사람이 되세요.”
1년이 넘게 지난 이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몸소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2022년 한 해 동안 지인의 15만평 농장에서 땀 흘렸던 시간은 말 그대로 사람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농사 지을 수 있는 체력이 있는 사람,
농업경영을 할 수 있는 사람,
외국인 인부들을 관리할 수 있는 사람,
작물들의 생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
해뜨기 전에 밭둑에 서 있고,
다음 날 다시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
미생물, 벌레, 토양, 물, 햇빛, 바람, 대자연의 섭리 속에 한 점 같은 존재임을 아는 사람.
그렇게 땅을 이해하고 하늘에 기대는 법을 배워가는 시간들을 지나 2023년 봄에는 드디어 홀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염려와 걱정 가득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말이죠. 역시 모든 출발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데 주작목 선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언제 파종하고 어떻게 키우고 수확해서 판매할 것인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고민 끝에 정한 것이 ‘미니밤호박’입니다.
아직 찬바람이 부는 올해 3월18일 친환경재배인증농가에서 모종을 키워주기로 해서 파종했습니다. 미니밤호박은 종자값이 꽤 비쌉니다. 종자 한 알에 550원, 2000주면 110만원입니다.
모종이 자라는 동안 밭을 갈고 친환경퇴비와 미생물을 넣어줍니다. 미니밤호박이 약120일 동안 먹을 양식입니다. 미생물이 땅속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해주는가가 작물의 맛 뿐 아니라 건강, 병충해 발생 등에 영향을 미칩니다. 4월7일 쯤 밭에 옮겨 심을 계획이었는데 새벽 기온이 9~10도를 오가고 있어 냉해가 우려되어 1주를 늦추어서 심었습니다.
4월 13일 2000주를 이틀에 걸쳐 둘이서 심었습니다. 역시 동네 사람들의 관심은 뜨겁습니다. 마늘, 양파, 고추가 주작물인 곳에서 미니밤호박은 약간 생소하기도 하지만 더 궁금한 건 저희들인 거죠.
“호박을 심는가~? 심는 간격이 너무 좁은 거 같은디”
“제초제도 안 하고 심으면 풀 감당은 어떻게 한다냐~ 민원 들어갈 수도 있어야~”
“무안에서는 4월25일까지 서리가 내릴 수 있응께 더 있다 심어야 될 것인디”
농업영역의 예언자들이실까요? 호박덩굴은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무성해졌습니다. 심은 지 열흘쯤 되었을 때 물 같은 서리가 내려 성장이 멈춘 아이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풀 때문에 아직 민원이 들어오진 않았지만 미니밤호박을 수확하는 요즘 유일한 일손인 아내가 뱀 나올까 무섭다며 작업을 거부하는 것을 보면 예언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첫 꽃이 피었을 때는 왜 그리 노심초사했는지 모릅니다. 암꽃이 필 때 수꽃도 피어야 수정되고 열매가 맺습니다. 그런데 첫 암꽃이 질 때까지 수꽃이 피어날 기미가 안 보이는 겁니다.
암꽃이 떨어지면 수꽃이 피고 수꽃이 떨어지면 암꽃이 피니 열매가 달릴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기상이변, 기후위기가 심각하다, 꿀벌이 사라졌다, 이런 뉴스가 자주 나올 때라 식물세계에 대혼란이 일어난 줄 알았습니다.

혼란은 농부인 저에게 더 많이 일어났습니다.
단호박 종류는 순지르기를 해줘야 하는데 원순(한순)기르기, 두순 기르기, 세순 기르기, 방임하기 등등 그 중 한 방법을 선택해 순 정리를 해줘야 한다고 합니다. 순 정리 방식을 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막상 가위를 들고 밭에 앉아서는 어디를 잘라야 하는지 헷갈리기만 합니다. 지나가며 훈수를 던지는 분들의 의견도 제각각입니다.
“아따 신농법으로 하는 갑네”, “그냥 내버려둬도 잘 큰당께”
순인지, 잎인지, 가지인지도 구분이 잘 안되니 어떤 건 줄기만 앙상하게 남기도 하고 광합성을 해야 할 잎을 다 잘라버리기도 하는 혼란 대잔치를 혼자서 하기도 했습니다. 늘 잔소리와 참견만 한다고 생각했던 동네분들이 진딧물이 발생하는 시점을 알려주고, 호박에 치명적인 총채벌레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어떻게 방제를 해야 하는지도 가르쳐주어 여기까지 잘 왔나 봅니다.
밭에 옮겨 심은 지 75일 즈음에 첫 수확을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첫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스마트스토어, 블로그, 지인들, 그리고 판매업체들의 미니밤호박에 대한 평가나 반응은 조금씩 다릅니다. 판매업체는 당도가 높아야 하고, 크기와 모양이 일정해야 반응이 좋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최저가격이어야 합격합니다. 반면에 택배를 받아보고 저의 얼굴이 보인다고 하시는 분, 흘린 땀과 수고가 느껴진다고 하는 분, 단맛보다 밤호박 자체의 여러 맛이 있어 좋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미니밤호박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제초제를 사용하는 대신 직접 풀을 뽑고, 땅이 살아나게 하고 작물들이 자연의 섭리를 따라 새로 움트게 하는 방식으로 농사짓는 과정 그 자체의 가치와 결과물을 산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을 생각하며 용기를 얻고 이제 가을 여행을 계획하려고 합니다.
무안 ‘농장 The 새로움’ 이동은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6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