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중화척(中和尺)
뱀은 정체가 좀 미묘하다. 해석하기도 좀 어렵다. 올 을사년은 푸른 뱀의 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문수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36가지 모습으로 변한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청사[靑蛇, 푸른 뱀]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박혁거세의 능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 뱀릉)이라고 한다. 박혁거세의 몸이 하늘로 올라가다 땅으로 떨어져 5갈래로 나뉘어졌다. 사람들이 하나로 모으려 했는데 뱀이 나타나 모으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오릉이 되었고 사릉이 되었다.
경문왕의 침전에는 항상 뱀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궁인들이 놀라고 두려워서 쫒아 내려고 하자 왕이 그만두게 하였다. 자신은 뱀이 없으면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경문왕이 잘 때는 뱀이 온몸에 올라와 혀를 내밀고 있었다고 한다. 둘 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얘기지만 왜 뱀이 나타나 박혁거세의 몸을 다섯으로 나눴는지, 왜 경문왕이 뱀들과 함께 잤는지는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다.
새해는 항상 기대와 희망으로 들뜨기 마련이다. 그런데 올해 뱀해는 좀 남다르다. 새해 기분이 별로 나지 않는다. 왜일까. 아마도 지난해 12월 일으켰던 비상계엄으로 인한 반헌법 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씨도 겨울이지만 나라도 겨울이다. 나라를 지탱하는 기준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복희와 여와. 국립중앙박물관. 투르판 아스타나 무덤출토.
그래서 올해 을사년 무엇보다 먼저 또 오르는 건 ‘자’다. 뱀이 자를 들고 있는 형상도 있다. 중국 전설 속의 인물인 복희는 아래는 뱀꼬리 위는 사람 몸을 하고 있다. 복희가 팔괘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한 손에는 곱자를 들고 있다. 보통 여와와 쌍으로 등장하는데 여와는 컴파스를 들고 있다. 모난 것을 잴 때는 구(矩, 곱자)에 맞추고, 둥근 것을 잴 때는 규(規, 컴파스)에 맞춘다고 한다. 복희와 여와가 세상 만물을 만들 때 사용했던 구와 규는 세상의 법도를 상징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법도가 무너지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다.
‘자’하면 떠오르는 게 암행어사다. 암행어사는 보통 마패를 가지고 다니지만 자도 가지고 다닌다. 암행어사가 갖고 다니는 자는 유척(鍮尺)으로 놋쇠로 만든 자이다. 지방 수령의 백성 착취를 막기 위해서다.
정조 중화척. 국립중앙박물관
사각유척. 국립고궁박물관.
수령이 포(布)로 세금을 거둘 때 눈금을 속인 자를 만들어 과도하게 거둬들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나라에서 정한 기준으로 만든 유척을 가지고 눈금을 속인 자를 가려내 바로 잡는 것이다. 백성을 위한 자가 유척이다.
한편 정조는 신하에게 자를 하사하기도 했다. 2월1일 중화절에 자를 하사해서 중화척(中和尺)이라고 한다. 자는 충역(忠逆)과 시비(是非)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중화척을 주면서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신하들이 요즈음 충성과 반역,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기준이 분명치 않으므로 이것을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홍재전서 권7》
정조가 오늘 우리에게 중화척을 내려 주는 것 같다.
명협 조경철,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
전)한국사상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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