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최초의 자화상 회화전통을 창조한
알브레흐트 뒤러의 자화상 (3)
|자화상과 자기정체성 확인하는 전통에서 탁월한 서양임을 깨끗이 인정합시다!
지난 두 번의 글을 통해 우리는 뒤러의 자화상에 대해 탐구하고 있는데. 자화상 혹은 자화상을 만들었던 화가들 자체가 탐구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목적은 ‘동양에는 없었던 자화상을 만드는 전통이 왜 서양에만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과 우리 신문의 [황혼과 여명] 시리즈에서는 동양은 뒤떨어지고 서양은 탁월하다는 선입견에서 출발하지는 않습니다. 또 정반대로 서양문화(명)의 한계에 도달한 지금이야말로 동양문화(명)의 탁월함이 나타날 시점이라는 의미에서도 나가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화상 전통이 없었던 동양에 비해, 그것이 오랫동안 존재했으며 지금도 있는 서양이 탁월하다는 현실은 인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런 자화상을 만들려는 심리 깊은 곳에 인간이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애쓴 서양이, 그런 것이 없었던 동양에 비해 낫다는 사실을 깔끔하게 인정하자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양의 모든 것이 서양에 열등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더 뛰어난 것도 많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가장 대표적 사례가 동양의 탁월한 공동체적 정체성입니다. IMF사태에서 우리가 보였던‘금모으기 운동’이라든지, 태안 기름유출 사건 때에 150만 명이 자원해서 그곳에 가서 봉사하며 보였던 공동체적 정체성은 서양인들이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이런 공동체적 정체성 자체도 동양 사회 전체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 또 그것을 누리는 것에 대한 책임의식이 약화된 가족 의존적 약함으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좁은 한국사회에서는 1) 65세 이상이 되면 지하철 공짜로 타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2) 시나 정부가 늙은 나에게 무언가를 해줄 것을 기대하며, 3) 좁은 땅에 살기에 정치에 대한 토론은 남자들 입에 늘 붙어 있으나, 스스로 지도자로 인정받아 앞에 나서기보다 누군가 탁월한 지도자가 나와서 이끌기를 기대하는 의존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의 정치제도인 민주주의가 견실하려면, 우선적으로 개개인의 자유를 누리면서 동시에 책임을 지는 자의식이 강해야 하며, 지도자 의존적이 되기보다(노사모,박사모,문사모,윤사모 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가 지도자로 나서더라도 사회를 공적으로 잘 지도할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동양과 21세기의 한국사회는 이런 것을 이루기 위해서, 더 근본적으로는 자화상 그리기 전통과 자기정체성 확립하는 전통을 새롭게 만들어야 할 시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 기준 앞에 서지 않는 자화상과 자기정체성 확인은 거짓에 가깝습니다!
그렇지만 이렇다고 자화상을 지금부터 그리기 시작한다고 해서, 또 자기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자기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한다고 해서, 이런 전통이 저절로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회화적 자화상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길이 있는데, 바로 일기쓰기입니다. 그렇지만 회화나 문학이라는 표현하는 예술의 장르라기보다, 내가 나를 어떤 (절대적,상대적) 기준으로 바라보고 평가할 것인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자기가 독자적으로 세운 성공을 위해 절치부심하는 모습을 매년 그리거나, 그렇게 자신을 매일 점검하는 일기를 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성공이 과연 오래가는(영원한) 가치를 가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그것은 거짓에 가깝습니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가 아무리 탁월한, 자기를 돌아보는 일기이고, 또 그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유익한 것일 수 있다 하더라도 일본을 용서하고 중국을 포용하여 동아시아 전체가 하나 되어 우주를 개척해야 할 21세기와 그 너머에서까지 줄 수 있는 의미까지 가지지는 않습니다. 일본에 대한 용서와 중국에 대한 포용이라는 항구적인 가치를 가지는 행동은, 정치,문화 그 자체에서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절대종교적 기초 위에서만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는 상대종교(불교,유교,도교)가 아니라, 신이 인간의 고통과 그 원인인 죄악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와서 인간의 죄의 모든 대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그 인간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했다는, 이 유일한 절대적 기준 외에는 정치와 문화에서는 용서와 포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동양인들이 시도할 수 있는 비범한 자화상이나, 그 어떤 깊은 차원의 일기쓰기라 할지라도, 그것이 과연 절대적 기준 앞에서 하는 것이냐가 궁극적인 관건일 겁니다. 물론 서양의 자화상 역사가 갈수록 붕괴되고 처참한 모습으로 변질되거나 혹은 새로운 표현 양상이나 방법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엇나가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절대적이지 않거나 오래가지 않는 그 어떤 위선적 가치는 가차없이 쓰레기통에 버린다는 최소한의 근본적 전통 위에 서 있음이 명백합니다. 이런‘가차없는 전통’은 틀림없이, 아무리 서양이 서서히 세속화문화(명)기에 깊숙이 도달하였고, 또 그래서 철저히 제거하려고 했던 바로 그 절대종교의 기초를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생겼다는 점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황제(유교) 혹은 자기(불교)라는 상대적 기준 앞에서만 오랫동안 살아온 동양은, 절대적 존재 앞에 자신을 세우면서 자화상 제작 전통을 만들며 그것을 통하여 그 심리적 근거가 되는 절대적 자기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전통은 적어도 서양에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뒤러 자화상의 위대성은 이런 절대적 기준점 위에 확실하게 서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자기긍정의 자의식(자화상-4)과 절대적 자기부정의 자의식(자화상-6) 그 사이의 ‘가장 격렬한 자화상’ 자화상-5(c.1508)
이전의 글에서 보았듯이, 뒤러의 최소한 6개의 정식 자화상과 그의 내면을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들(MELANCORIA I 1514, DESPAIR 1516)이 가진 위대성은 그가 이런 기준에 철저하게 서서 작업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의 정식 자화상이 이룬 발전 혹은 전개 과정은 이런 가차없음과 처절하게 근본을 추구하는 정신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즉 자화상-1(1484, 13세의 자화상)에서 자화상-2(1493), 자화상-3(1498)을 거쳐서 ‘가장 화려한 자화상’ 인 자화상-4(1500)에 이르며 최정상에 도달하는 하나의 차원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곧 이어서 ‘가장 격렬한 자화상’ 인 자화상-5(c.1508)를 거쳐 종교개혁이라는 분깃점(1517)을 지나, ‘가장 비참한 자화상’인 자화상-6(1522)에 이르는 내리막길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을 보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뒤러는 절대자, 즉 창조주 앞에 선 창조자로서의 자의식을 명확하게 그려낸 ‘가장 화려한 자화상’인 자화상-4를 그리면서 절대적 자기긍정의 자의식에 도달한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자마자 즉각, 혹은 오래 분석했다고 할지라도 뒤러가 자신을 마치 예수처럼 그린 이 자화상을, 매우 교만한 작품으로 오해할 정도로, 자의식이 충만하게 고양된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렇게 교만하게 보일 정도의 자의식이어야 사실 제대로 된 자의식이며, 이럴 정도의 절대적 자의식이 아닌 것은 사실상 뒤러에게나 역사적으로나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또 그런 자의식을 가지고 역사의 현실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할 때에 부딪치는 수많은 고통,어려움,도전,제약 앞에서 격렬하게 투쟁하는 시간을 뒤러는 보냈습니다. 그런 모습을 자화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벌거벗고 성기까지 노출한 채 몸을 비튼 채로 앞으로 살짝 숙인 가운데, 눈을 번쩍 뜨고 앞을 쏘아보는 ‘가장 격렬한 자화상’ 인 자화상-5(c.1508)입니다. 이 자화상의 연도가 애매하지만, 1500년에서 종교개혁년도인 1517년 중간임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을 흐른 후에야, 네덜란드 여행에서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심각한 질병을 겪으면서 ‘아픈 뒤러’(1521)라는, 의사의 진단서 처방처럼 자신의 아픈 몸의 상태를 그렸습니다. 그 후에 ‘가장 비참한 자화상’ 인 자화상-6(1522)을 완성했습니다. 자화상-4(1500)에서 자화상-6(1522)에 이르는 22년이라는 긴 세월은 뒤러에게는 철저한 하강곡선을 그리는 절대적 자기부정의 자의식에 도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22년 사이에 일어난, 뒤러에게나 전 유럽사회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종교개혁(1517)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뒤러 개인에게 가진 종교적 진리의 내면적 의미는, 그 당대의 종교개혁에 참여하였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생 전체를 뒤바꿀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이전 글에서 뒤러의 1차적 고민). 하지만 당대까지 어거스틴의 신플라톤주의적 신학을 따라서 종교와 문화를 철저히 이원화시킨 세계관을 제시하던 로마교를 더 근본적으로 떠나려면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새롭게 된 종교를 일상의 삶, 즉 예술세계 속에 새롭게 창조해 나가야하는 종교적 진리의 외면적 의미를 구현하는 것이었습니다(뒤러의 2차적 고민). 그렇지만 이것은 지금 막 세운 종교의 새로운 기초 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오랜 시간을 걸쳐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해가면서 구현해 나가야 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뒤러의 늙어가는 나이가 이것을 성취하는 것을 어렵게 했고 결국 실패하게 만들었습니다.
먼저 뒤러는 루터의 대변인 격인 멜란히톤이 뒤러의 도시 뉘른베르그에 와서 한 설교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아 동료들과 자신들은 이제부터‘마르틴(루터)의 군대‘라고 여길 정도로 열렬히 반겼습니다(1517).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예술세계에서 구현할 것인가를 진득하게 고려할 겨를도 별로 없는 가운데 사건들이 뒤러를 휘몰아쳤습니다. 자신을 후원하던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1519), 신임황제의 공적 후원을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아흔(Aachen)에서 거행되는 황제 대관식에의 참여(1520), 이어서 부인과 함께 한 길었던 네덜란드 여행, 그리고 왕들과 제후들로부터 받은 극진한 환대, 하지만 정반대 결과로 늙은 나이에 걸려버린 치명적 질병(1521)이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뒤러 개인에게보다 종교역사에서 더 중요한 사실은, 1517년의 종교개혁이라는 사건 자체는, 종교적 삶을 총체적으로 구현하는 일에 개신교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상태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새 종교 자체가 발생시킨 새로운 국면들인‘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연이어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농민전쟁(1525 해석문제1)과, 루터와 즈빙글리 사이의 성만찬에 대한 마르부르그 논쟁(1529 해석문제2)은 뒤러의 생애 최후반(1528)까지도 마저 정리할 수 없는 초강력 도전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새로워진 종교의 기초’ 위에서 ‘새로워진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으로 예술작품을 만드는 일’은, 그의 후반부 생애의 에너지를 모조리 끌어 모은다 하더라도 도무지 성취할 수 없음을 직감했을 겁니다. 이것이 그가 ‘가장 비참한 자화상’인 자화상-6(1522)을 제작한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즉 자화상-4(1500)에서 보인 창조주를 닮은 (예술)창조자로서의 절대적 자기긍정의 자의식이라는 이상은 죽음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는 없었겠지만, 현실에서는 그것을 성취할 수 없다는 절대적 자기부정의 자의식에 도달했음을 보인 것이 자화상-6(1522)이었다는 겁니다.
|뒤러의 창조적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발현해 나간 과정들
먼저 우리는 뒤러가 만든 자화상 자체를 이해하는 것보다, 그것을 제작할 때 그가 가졌을 창조주 하나님을 닮은 창조자 인간인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어떻게 발현,발전,충만,충돌,위축되어갔던가를 살피려고 합니다. 궁극적으로 영원한 것은 탁월한 창조적 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려고 예술가의 내면에서 추동하는 자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있다면 그의 생애가 연속되는 한 얼마든지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창조된 하늘과 땅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창조주인 것과 같습니다. 뒤러의 창조자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은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전개되었습니다.
그 첫째 과정은 뒤러와 아버지의 근본적 차이가 흔한 부자간의 역사적 차이가 나는 정도가 아니었다는 데 있습니다. 북유럽의 예술정신이 계속 유지되고 남유럽의 르네상스 기운이 꽃피우는 15세기 말에, 뒤러는 스스로를 평가하기를 단지 아버지를 따르는 금속장인이라는 기능인,기술자 정도가 아니라,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신을 닮은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스스로 선명하게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자의식이었지만, 스스로 가졌을 뿐 아니라, 자화상 전통이 아직 세워지지 않은 문화와 사회 속에서,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스스로 그 전통을 창조해 내며 평생을 걸쳐서 나타날 그 첫 사례로 선보인 것이, 이미 다루었던, 자화상 1(1484)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신학,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평신도로서 또 오히려 평신도였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적 질문에 대한 간결하고 명쾌한 대답을 스스로 지녔을 겁니다. 즉‘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와 거기서 더 나아가‘그러면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 나는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그것을 운영하거나 재창조하는 창조자로서의 사명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성경계시와 가족적 경건을 통해 스스로 확인해 갔을 겁니다. 이 확인은 신학,철학을 공부하고 하지 않고의 문제도 아니며 나이,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가지게 되는 근본 질문이므로, 누구나 즉각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문답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의식이 그가 결혼 직전에 신부에게 보이기 위해 제작한 자화상-2(1493)에도 나타남을 우리는 이미 다루었습니다. 충성,정절을 나타내는 엉컹퀴(에린지움)를 들고 서 있는 이 그림에‘나의 사명은 위(별)에 새긴 것 같으니’라고 써놓았다는 데서,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높은 이상을 품은 22세의 젊은이를 볼 수 있습니다.
둘째 과정은 창조자 예술가로서의 실질적 기초를 역사와 현실 속에서 실제로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도제식 유랑을 하면서 북유럽의 고딕적 전통에 속한 기술과 예술적 기량을 철저히 습득했습니다. 게르만족의 북유럽은, 종교적 위선이 남유럽보다는 덜 했기 때문에, 평신도의 입장에서는 하늘을 찌르는 첨탑에서 보이는 위를 향한 경건과 함께 개발된 기술을 습득하는 데 있어서 종교적 양심의 어려움이나 고통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북유럽적 고딕적 전통이 가진, 현실 세계를 무시하고 천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신플라톤주의적 경향의 한계를 늘 의식했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 제4차 십자군운동(1205) 이후 베네치아가 지중해 패권을 가져오며,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으로 비잔틴제국의 핵심인재들과 자산들이 대거 베네치아로 몰려오면서 유럽은 거대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과 함께 고전 그리스어에서 아랍어로 번역되어 아랍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들이 유럽에 소개되고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고대 그리스에 대한 향수가 폭발하여 일어난 운동이 르네상스였습니다.
신플라톤주의적인 어거스틴을 정신적 지주로 삼은 로마교가 이런 문화적 격변을 다루는 방식은, 문화를 종교의 지배 아래 두는 어거스틴적 이원론을 유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그대로 지니되, 문화,예술은 그것이 어떤 종교적(신화적) 기초를 가졌더라도 관계없이 발현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교황청은 비기독교적인 것이 명백한 그리스 신화를 예술로 표현하게 것을 허용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장려하여서 흥왕하게 하였고, 이런 로마교의 비호 아래 르네상스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라난 뒤러는 베네치아와 남유럽에서 격랑을 일으키는 르네상스와 그 예술을 배워야 한다는 자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결혼 직후 또 중년에 다시 한 번 더 베네치아를 방문해서 그 예술을 철저히 흡수했습니다. 이런 속에서 그는 26세(1498)에 베네치아의 영향이 충만한 멋진 옷과 화려한 복장, 그리고 자신감이 넘치는 자화상 3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8세(1500)에 창조자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충만한 작품인 ‘가장 화려한 자화상’ 자화상 4를 그렸습니다.
셋째 과정은, 그의 핵심 관심이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으로 종교와 예술이 통일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근본적 문제를 푸는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로마교의 이원론적 관점에서 신학적,철학적 문제의 소지가 많은 성인숭배나 성모의 승천과 대관식, 심지어 그리스 신화에 대한 작품들을 당대의 전통을 따라 그 역시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예술이 그 근본이 되는 종교와 불일치한다는, 웬지 모르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불편함 혹은 거북스러움이 그의 영혼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점을, 후일에 일어난 종교개혁에 그가 그렇게나 열렬히 환호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들이, 로마교적 당대나 세속문화적인 21세기의 지금도 열광적으로 환영받곤 하지만, 이들이 이 질문을 덮고 간 것에 비해, 뒤러는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들 이후에 남유럽에서는 자화상 전통이 창조되거나 발전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술가의 모든 작품이 사실상 화가 자신을 나타내는 자화상이라는 신념을 유지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작품활동을 하는 화가와 그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드는 자화상 전통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가 결코 만들지 못한 새로운 창조적 영역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이원론적이고 위선적인 로마교 아래서는 자기부정이나 자기확신 등의 자아 자체와 투쟁하는 자화상을 제작하는 전통이 형성될 수 없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에 로마교는 근본적으로 자기반성을 할 기회를 상실하였고, 종교개혁에 반해서 소집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로마교의 어긋난 교리들을 더 확증하고 예수회를 앞세운 가운데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을 일으킬 뿐 아니라, 그 후 30년간 진행된 종교전쟁(1618~1648, 물론 개신교 쪽도 책임이 있음)으로 유럽을 피폐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교황무오설(1870)까지 확증하는 쪽으로 나갔습니다. 이런 영적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떠나서 점점 더 마귀처럼 변해버리는 자아에 대한 절대적 자기부인의 자화상은 불가능합니다. 더더구나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와서 다시 창조자의 능력을 회복하는 절대적 자기확신의 자화상 역시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동양 사회와 문화(명)에서 자기를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자신과 투쟁하는 자화상 제작의 전통을 수립할 수 없었던 근본적 이유가 절대자 앞에서 벌거벗고 선 자신을 세울 수가 없었던 상대종교적 기초 때문이었음과 일맥상통합니다. 인간 스스로가 완전하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신이 되면 자기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자화상을 그릴 이유가 없어집니다. 설령 그린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영웅화(황제, 유교)하거나 신격화(부처, 불교)할 뿐입니다.

이런 가운데 뒤러는 자기 내면으로 행했던 처절한 투쟁을 ‘가장 격렬한 자화상’자화상-5(c.1508)에 그려내었습니다. 이 섬뜩한 자화상은 자기확신의 충만함을 그렇게 당당하게 표현했던 ‘가장 화려한 자화상’자화상-4(1500)와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가식적 웃음 뿐 아니라 일말의 위선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를 정직하게 자기의 벌거벗은 몸으로 표현할 줄 알았던 뒤러에게서 보는 이런 대비는 가히 충격적입니다. 현실적으로 뒤러의 명성은 1500년 이후 제작한 판화가 불티나게 출판되어 팔려나감에 따라 전 유럽을 넘어 점차로 크게 높아졌으며, 나중에는 북유럽의 거의 모든 왕들과 귀족들이 그를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출판된 그의 판화로 유럽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특수한 작품의 제작을 부탁했으며, 유학했던 베네치아에서도 드디어 그를 최고 수준의 예술가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에서는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그것을 향해서 불의 전차처럼 달려가는 모습이 자화상-5에 담긴 겁니다.
이 자화상에 가장 현저한 것은 손은 뒤로 제끼고 몸은 살짝 앞으로 기울이면서 성기까지 노출한 가운데 화난 듯이 앞을 노려보는 뒤러의 눈입니다. 이 무시무시한 눈의 주인공은 그 전의 모습과는 정말로 달랐습니다 : 작지만 맵고 단단한 확신으로 자신의 조그맣지만 섬세한 것을 그려낼 확신을 품은 자랑스러운 손을 내보이는 자화상-1(1484), 예술가로서 가장 중요한 육체인 손으로 엉컹퀴를 쥐고 자신의 미래를 불안하지만 확신으로 투사하며 바라보는 자화상-2(1493), 이제 막 얻은 고향에서의 성공으로 자족하는 모습으로 느긋하게 바라보는 눈을 묘사한 자화상-3(1498),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포괄해서 예술화할 수 있으며 사물과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통찰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진 눈을 그리는 자화상-4(1500).
그가 이럴 정도로 격렬한 투쟁을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힌트를 그의 심리상태를 그대로 드러낸 유사한 시기에 제작한 그의 두 작품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1514년에 만든 MELANCORIA I과 1516년에 제작한 DESPAIR입니다. 전작 MELANCORIA I에서 예술품을 제작하는 온갖 도구들이 어지럽게 펼쳐진 가운데 천사(천재)가 우울하게 앉아있지만, 여전히 어두움을 뚫고 빛처럼 다가올 영감을 기다리는 듯합니다. 여기서 위를 향해서 살짝 치켜뜨고 노려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그려진 DESPAIR에서는 예술제작 자체에 대한 고민보다는 인간의 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고민인 욕망,좌절,절망 등을 표현합니다. 첫째 작품 속에서의 우울은 그가 천재라 할지라도 예술의 한계를 돌파하지 못해서 고민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M.Brion[Duerer his life and work](1960)은 잘못 해석합니다. 그렇지만 뒤러는 예술의 창조성에 대한 고민은 이미 넘어선, 천년에 한번 나올 예술천재였음을 스스로도 확신한 사람입니다. 그의 더 근본 문제는‘어떻게 예술적으로 그릴 것인가’하는 2차적 예술적 질문보다, ‘누가,무엇을,왜 그리는가’ 하는 1차적 종교적 질문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첫째 작품보다는 둘째 작품에서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욕망,죄악,가치,의미,영원 등의 종교적 문제로 씨름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고민을 하던 바로 1년 후에 전 유럽을 강타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자마자, 뒤러가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동참하였던 사실에서 이런 해석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또 그 이후의 뒤러의 작품 제작은 매우 드물었고 제작했어도 대부분 개신교 원리를 따라서 만들었으며, 마지막 생애에 가서는 예술의 원리에 대한 책들의 제작에 몰입한 것도, 모두 종교적 기초 아래서 제대로 된 예술의 기초를 쌓고자 하는 바램에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뒤러가 격렬하게 품었고 해결하기를 원하던 1차적 종교적 질문은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어올림을 통해 말끔히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2차적 예술적 질문에 답해야 할 차례인데, 처음에는 매우 쉬울 것 같이 예상되었습니다. 1차적 종교적 질문은, 하나님이 공짜로 베풀어주시는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인간이 절대적으로 신뢰함을 통해 얻음으로 단번에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베푸시는 의를 수동적으로 얻음으로 완전한 출발을 단번에 새롭게 할 수 있었던 셈이지요(‘수동적 의’).
그러면 남은 과제는 앞으로 살아야 할 생애와 인간들의 역사 속에서 이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뒤러와 같은 예술가들이 창조적으로 이루며 능동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에 가기 위한 자기노력이 없어도 된다는 루터의 메시지는 중세인들에게 격렬한 해방감을 한순간에 선물했을 겁니다. 그 만족감이 너무나 컸었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을 닮은 창조자인 예술가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쉬울 것 같아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해방의 선물에 감사하는 삶을 능동적으로 사는 것은 한 순간의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기나긴 생이나 한 사회의 긴 역사를 관통하여 이루어져야 했습니다(‘능동적 의’). 다시 말하면‘수동적 의’를 선물로 받는 것은 한순간의 일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창조자 예술가로로서의 삶을 사는‘능동적 의’로 보답하는 일은 새로워진 전 생애를 통하며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으며, 삶,문화(명),역사의 총체성 가운데서 구현되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뒤러의 다섯째 자화상(c.1508)인 ‘가장 격렬한 자화상’은 루터의 메시지를 통하여 수동적 의를 하나님으로부터 공짜로 얻는 것이 우선적임을 확인하기 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그 격렬한 자아가 극도의 불안함을 안고 투쟁하는 불안한 순간은 이제 모두 지나고 태평양 같은 평화의 시간이 뒤러의 의식 가운데 순식간에 찾아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은혜를 창조자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감으로서 하나님께 갚아드리는 것은 평생의 일이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삶을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드리려는 새로운 과제는 나 혼자만의, 혹은 나의 자의식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역사 속에서 성취해야 하는 일입니다. 뒤러는 이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예술가의 첨예한 촉각으로 즉각 알아챘습니다.
먼저 이 어려움은 일차적으로는 이전 글에서 이미 말한 대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 중의 제2계명을 어기지 않는 가운데 시각예술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데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뒤러가, 그렇게 존경했던 루터를 신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루터가 여전히 가졌던 중세적 경향, 즉 어거스틴의 신플라톤주의적 이원론적 해석 때문에 예술을 비롯한 문화(명) 전반이 루터 신학 속에 화려하게 꽃피울 자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차적으로는 모든 것의 판단 기준으로 새롭게 등장한 성경에 대한 어떤 해석이 옳은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는 먼저 뒤러가 생애의 최후반부에 직접 경험한 독일사회를 파멸로 이끈, 뮌스터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전쟁(1525 해석문제1)으로 아주 절실해졌지만, 예술가로서 뒤러가 개인적으로 지금 당장 기여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적었습니다. 루터의 어거스틴적 해석학 자체가‘중세적’일 뿐 아니라, 농민전쟁을 일으킨 토마스 뮌쩌의 천년왕국이론 역시‘중세적’이었습니다. 즉 중세적 해석 정신이 근세의 옷을 입고 다시 등장해서 투쟁을 벌인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뒤러가 죽고 1년 후에 성만찬에 대한 독일의 루터와 스위스의 즈빙글리 사이에 일어난 마르부르그 논쟁(1529 해석문제2) 역시 ‘중세적’이었습니다. 이는 뒤러 생애의 후반부에 분출되었던 문제이지만, 평신도인 뒤러가 이 문제에 대해 도울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중세 내내 있었던 이데아적,실체론적 해석학(루터)과 아리스토텔레스적,명목론적 해석학(즈빙글리)이 근세의 옷을 입고 16세기 초에 재등장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태평양과 같은 평화의 시기가 순간적으로 지나가고, 매우 고통스러운 태풍이 불어닥치는 역사가 벌어질 상황에서, 뒤러는 종교와 일치하는 예술의 발휘라는 예술가적 자의식이 발현되는 넷째 과정을 지납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가장 비참한 자화상’인 자화상-6(1522)입니다. 그는 독일의 아흔(Aachen)의 황제 대관식을 거쳐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지방을 방문하면서 마치 황제처럼 칙사대접을 받았습니다(1519~1520). 하지만 이어진 네덜란드 북부에 나타난 고래에 대한 소문은 뒤러의 예술적 탐구심을 자극하여서 그것을 보러 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허탕만 치고 오히려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가운데, 겨우 추스려서 고향인 뉘른베르그에 돌아올 수 있었으며, 1년 후에 제작한 것이 바로 이 자화상입니다. 더 이상 예술가적 자의식을 성취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그의 의식을 사로잡았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 자화상-6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뒤러가 붙인 특이한 제목으로, 이전에는 뒤러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붙이며 작업했던, ‘슬픔의 사람’(Man of Sorrows)입니다. 그리고 그가 손에 쥐고 있는 몽둥이와 채찍은 그리스도를 그릴 때에 매번 덧붙였던 것으로, 인간이 후려치는 몽둥이와 채찍을 예수가 맞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 몽둥이와 채찍을 이제는 화가인 자신이 들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그런 고통과 고난을 받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가장 화려한 자화상’인 자화상-4(1500)가 마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교만한 작품으로 여겨졌듯이, 이 마지막 자화상인 ‘가장 비참한 자화상, 자화상-6(1522)은 정반대의 의미인 구속주(예수)의 모습을 닮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역시 오해될 소지가 많은 작품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인간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매우 역설적으로 그 점이 바로 십자가로 승리를 얻은 것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뒤러가 바로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승리한 예수를 빼닮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뒤러는 실제로 예수처럼 가시왕관을 억지로 씌움을 받는다든지, 얼굴에 침뱉음을 당한다거나, 몽둥이와 채찍으로 맞아서 신음하며 육체에 피를 흘린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자신을 표현한 것은 과장이 아닌가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술가에게 기대해야 하는 것은, 그의 예술적 상상력을 얼마나 창조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느냐이지, 그가 묘사하는 것을 얼마나 실제로 경험해보았는가는 아닙니다. 살인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소개하는 문학가가 반드시 살인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뒤러는 아주 섬세한 예술가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앞으로 모든 창조자로서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생애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그 고통을 선험,선취하여 천재적 능력으로 시각화시켰던 것입니다. 역사와 문화(명)를 피상적으로만 판단한다면, 어떤 인물이나 사건의 눈에 뜨이는 성공한 모습만을 보기 쉽습니다.
뒤러처럼
1) 창조주 하나님을 닮은 창조자 예술가로서의 사명을 속으로 확고하게 가졌고, 또
2) 그것을 이룰 천재성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3) 엄청난 노력으로 최고의 경지에 올랐지만,
4) 그 사명을 성취해야 할 자신의 생애의 시간이 사회와 문화의 시간과 일치하지 않아서 허무하게 스러져가 역사 속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사람이, 그 천재성과 함께 성공한 자취를 남긴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을 수가 있습니다.
뒤러의 삶과 그 마지막 고백에 해당하는 자화상-6(1522)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격려가 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스스로가 창조주가 행할 역사의 궁극적 심판을 진실로 믿는다면, 역사 속에 항구적 자취를 남기는 일조차도 자신의 최종목적이 아니어도 되는 겁니다. 치명적 질병으로 고생하면서 이제는 서서히 닫혀져가는 생명을 지닌 채 창조자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한 점 때문에, 총체적 인생으로 겪는 슬픔과 고통은, 채찍과 몽둥이로 육체가 두들겨 맞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고 고통스러웠음을 자화상-6(1522)이 말하는 것 같지 않나요? 그렇지만 바로 이런 점이 뒤러 예술이 예술 자체로서의 한계를 초월하여 가장 깊은 종교적 영역으로까지 밀고 나가게 한 가장 탁월한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천재적이라고 칭찬받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조차도 도달하지 못한 영역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더 크게 감동받습니다.
또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관찰하여 자연스럽게 주목하는 ‘가장 화려한 자화상’인 자화상-4(1500)보다, 40.8cmx20cm의 조그만 사이즈에 연필로 그린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이 ‘가장 비참한 자화상’인 자화상-6(1522)이 그의 자화상의 최고봉인 점은, 정반대의 논리이지만 E.Panovsky(1955)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Panovsky는 자화상-4(1500)를 위선적 작품으로 잘못 평가해서 정직한 자화상-6(1522)을 최고로 여기는, 다소 성급하고 단순한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화상-4(1500)을 그 자체로 가치가 매우 충만한 작품으로 귀하게 여기지만, 그것에 역설적으로 대비되는 자화상-6(1522)이 창조자로서의 소명을 성취하지 못한 실패한 천재의 모습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하게 보여준다는 점에 더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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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호 [알브레흐트 뒤러의 자화상 (2)]에 대한 글을 교정합니다.
1. 12면, 뒤러가 자신이 만든‘전몰농민기념탑’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붙이고 그것을 책으로 낸 부분을 나중에 읽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치밀하게 읽고 숙고하지 않은 채로 피상적 판단과 잘못된 추론으로 글쓴 것에 독자 여러분에게 사과드리며 용서를 구하고 다음과 같이 고칩니다.
원문 : “칼을 가진 기사가 승리자처럼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지만, 얼마나 자신이 없었던지 혹은 부끄럽다는 듯이 잔뜩 웅크린 자세입니다.” → 기념탑의 아래부터 설명하던 뒤러는 가장 꼭대기에 있는 인물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영어 번역) : “...topped by a lard tub upon which sits an afflicted peasant with a sword stuck into his back”
교정문 : 그러므로 뒤러의 글을 따라 제 글은 이렇게 교정되어야 합니다. “가장 꼭대기에는 칼이 등에 내리꽂힌 채로 웅크리고 죽은 고통하는 농민이 놓였습니다.”
2. 12면, 원문 : “Thomas Muenster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난”→ 교정문 : “Thomas Muentzer를 중심으로 Muenster라는 도시에서 일어난,”
3. 13면, 두 사진에 대한 설명이 서로 뒤바뀌어야 합니다.
Duerer MELANCORIA I (1514) ↔ Duerer DESPAIR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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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장(長) 송축복
segensong@gmail.com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6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