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맞이하며 - 희생 위에 선 오늘

6.25를 맞이하며 - 희생 위에 선 오늘


  특별한 6월의 기억

   6월 3일, 제21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이번 선거는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평화롭게 진행된 것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계엄과 탄핵 사태로 인해 급하게 치러졌기에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매우 불안하고 어수선했습니다. 여야의 지지율도 팽팽하게 맞서며, 나라는 점점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 극심한 갈등 양상을 보였습니다. 6월이 되자, 정치적·이념적으로 더욱 분열되는 현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6월은 저희 가족에게 매우 특별한 달이기 때문입니다. 매년 6월 6일 현충일이 되면, 외할머니와 어머니, 이모, 외사촌들과 그리고 저는 가장 단정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국립현충원을 찾았습니다. 바로 6.25 전쟁에 참전하셨다가 끝내 전사하신 외할아버지의 묘지를 찾아뵙기 위해서입니다.

 


  불과 3세대 전의 이야기

   20살에 시집오신 외할머니는, 결혼 5년 만에 25살의 나이로 두 딸(5살, 2살)을 둔 채 전쟁 미망인이 되셨습니다. 남편 없는 집에서 어린 자식 둘과 시부모님을 모시며 30년 넘게 묵묵히 살아오신 외할머니는 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시던 외할아버지가 퇴근 후 5살 된 딸을 어깨에 목마 태워 놀아주시고, 함께 저녁을 먹던 그 시절을 가장 행복한 때로 기억하셨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고통을 간신히 지나, 잠시 누렸던 평화는 6.25 전쟁으로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27살, 국가의 징집 명령을 받은 외할아버지는 어린 두 딸과 아내, 부모, 형제들을 뒤로한 채 전쟁터로 떠났고, 결국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참전으로 집을 떠난 후, 매일 밤 “아빠~”를 부르며 우는 아이를 달래며 시부모님께 들릴까 입을 막고 울음을 삼켜야 했던 기억은 어머니와 외할머니 모두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외할아버지의 유품으로는 군 복무 중 찍은 단 한장의 사진만이 돌아왔습니다. 앨범 속 다소 마른 체구에 담담하면서도 따뜻한 미소를 띠고 계신 그 사진을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납니다.

  어린 저는 철없이 “에그, 공산당 싫어! 할머니는 왜 공산당 사진을 가지고 있어?”라며 사진을 집어 던졌고, 외할머니는 웃으시면서 그 사진을 조심스레 닦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산당 아니야, 너희 외할아버지야.”
 순간 얼마나 죄송하고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나의 작은 영웅, 전사하신 외할아버지

  그날 이후, 외할아버지는 제게 영웅이 되셨습니다. 저도 외할아버지를 닮아, 나라를 위해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한때는 군인이 되길 꿈꾸기도 했고, 6월 6일을 단지 ‘빨간 날’ 정도로 생각하는 친구들을 볼 때는 답답한 마음에 그 의미를 열심히 설명하곤 했습니다. 6월 25일에는 외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일부러 즐거운 일은 삼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저 나름대로 외할아버지와 나라를 위한 작은 실천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6월이 찾아왔고,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지 며칠 지나지 않아 현충일을 맞이했습니다. 전쟁 속에서 생명을 바쳐 나라를 지키신 분들이 계셨기에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와 평화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그분들께 진심 어린 감사와 존경을 다시 한번 전하고 싶습니다.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했던 이 나라가 이제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K-열풍’을 이끄는 나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조부모 세대와 아버지·어머니 세대의 희생과 인내,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신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후대로서 이 나라가 더는 분열과 갈등 없이, 주권을 지키며 평화롭게 나아가도록 하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더 Culture 박상은 기자

joyfuloil@empal.com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