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12월 3일, 동덕회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 되면 새로 기억하는 날이 생겼습니다. 작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죠. 비상계엄은 위헌으로 판명되어 대통령은 파면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재판은 1년이 지난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12월 3일은 역사의 비극적인 비상계엄이 선포된 날이지만 국민의 힘으로 막아냈기 때문에 국민주권 승리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다룰 이야기는 250년 전 영조 때인 1775년 12월 3일(음력)의 일입니다. 영조는 세손인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홍인한 등이 이를 저지하려 했습니다. 세손의 입장에서는 대리청정이 문제가 아니라 장차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하지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서명선이 나서서 홍인한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세손은 대리청정 이후 왕위에 올랐고 이후 ‘동덕회’란 모임을 만들어 이날을 잊지 않고 기념했습니다. 동덕회 회원들은 노론, 소론 등으로 특별히 당색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현재 용산의 리움미술관에는 동덕회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인 김종수에게 보낸 정조가 짓고 쓴 어제시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경에게 일찍이 이 자리서 취하길 윤허했는데 / 許卿曾醉此筵杯
이달 이날은 해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누나 / 今月今辰每歲廻
어찌 호남백 한 사람만 모자람에 그쳤으랴 / 可但湖南人少一
경은 응당 동곽에서 찬 매화와 마주했겠지 / 秖應東郭對寒梅
《홍재전서》 (고전번역원 번역)

둘째 구에 보이는 ‘금월금신(今月今辰)’은 ‘이달 이날’이란 뜻으로 구체적으로 12월 3일을 말하고 전시물에 보이는 ‘임자납월삼일(壬子臘月三日)’은 임자년(1792) 12월(납월) 3일을 말합니다. 이날 모임의 이름인 ‘동덕회’는 《서경》의 ‘난신십인(亂臣十人) 동심동덕(同心同德)’에서 따온 말입니다. 난신 10인이 마음을 함께하고 덕을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주몽이 부여를 탈출할 때 오이, 마리, 협보 세 사람이 따라왔는데 고려의 이승휴는 《제왕운기》에 이를 ‘삼신동덕(三臣同德)’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난신’은 정치를 잘하는 긍정적인 신하를 말합니다. 널리 알려진 난신적자(亂臣賊子, 반란하는 신하와 도둑놈의 자식)의 부정적인 난신이 아닙니다. ‘난(亂)’은 흔히 어지러울 난이란 뜻으로 쓰이지만 ‘다스릴 난’자로도 쓰입니다.
세상에는 ‘어지러울 난’자의 얼굴을 가지고 ‘다스릴 난’자의 가면을 쓰고 자신이 마치 ‘난신십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정치인들이 많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05년 ‘을사늑약’에 동조했던 이완용 등 ‘을사 5적’도 가면을 쓴 난신적자였습니다. 또한 가깝게는 작년 12월 3일 비상계엄에 동조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했지만 ‘도적’과 비슷한 정치를 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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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조가 기념한 1775년 12월 3일 ‘동덕회’ 날은 앞으로 사람들에게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의 날로 새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많은 국민들이 나서서 ‘동심동덕’의 마음으로 계엄군을 막아내고 국회를 지켜냈던 국민주권 승리의 날로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조경철 역사학자
《거꾸로 읽는 한국사》저자,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한국사상사학회장(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