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철의 한국사칼럼 27] 무령왕릉 진묘수, “너를 천년동안 지켜줄게” 백제는 흔히 ‘잃어버린 왕국’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게 많아서인지, 잊은 게 많아서인지, 빼앗긴 게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700년 역사에서 남아있는 것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아마 일제강점기 상당 부분 도굴 또는 도굴에 가까운 발굴로 상처를 입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릉은 구사일생으로 도굴되지 않았습니다. 1971년 발굴됐으니 올해로 벌써 발굴 50주년이네요. 무령왕릉이 도굴되지 않은 건 일종의 행운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발굴(도굴)자의 착각 덕분이었지요. 가루베 지온(1897~1970)은 송산리 고분들을 발굴하면서 무령왕릉을 능이 아닌 언덕으로 생각했습니다. 1971년 여름 어느 날, 긴 장마에 대비하여 송산리 고분의 배수로를 만들던 중 땅을 파던 삽 끝에 무언가 걸렸습니다. 아래를 파보니 그곳에는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무령왕릉이 있었습니다. 무령왕릉 안에는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지석(땅속에 묻는 비석)을 비롯해 수없이 많은 유물이 들어있었습니다. 무령왕릉의 입구는 벽돌로 막혀있었는데, 벽돌을 허물자 안개인 듯, 수증기인 듯한 기운이 뿜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29]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조선시대 왕들 가운데 ‘군’이 들어간 세 왕이 있었다.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이다. 노산군은 숙종 때 단종으로 복권되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여전히 군으로 남아있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쫓겨났고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쫓겨났다. 반정(反正)은 ‘바르게 돌려놓다’는 뜻이다. 연산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있던 박원종은 신수근을 찾아갔다. 박원종은 신수근과 장기를 두는 데 장기 알의 ‘궁(宮)’을 서로 바꿔 놓았다. 신수근에게 반정에 참여해 달라는 표시였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다. 연산군의 부인 신씨는 신수근의 여동생이었다. 장차 연산군이 폐위되면 신씨도 폐비가 되고 신수근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반정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원종은 왜 반정과 같은 일급비밀을 연산군의 처남이자 신씨의 오빠인 신수근에게 알려주고 같이 참여하자고 했을까. 실은 신수근은 박원종이 장차 왕으로 추대할 진성대군의 장인이기도 했다. 신수근의 딸 신씨는 반정이 성공하면 나중에 진성대군(중종)의 부인 곧 왕비가 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박원종은 왕의 장인이 될 신수근에게 반정을 알리고 자기편에 서달라고 한 것이다. 신수근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32] 나라이름 ‘고려’와 영문표기 나라 이름 ‘고려’는 태조 왕건이 세운 나라의 이름이다. 우리나라의 Korea란 영문국호도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란 나라 이름은 태조 왕건이 맨 처음 사용한 나라 이름이 아니다. 후삼국의 궁예가 먼저 사용한 나라 이름이다. 궁예는 처음 고려란 나라 이름으로 시작해서 이후 마진, 태봉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런데 궁예의 고려도 궁예가 처음 사용한 나라 이름이 아니었다. 고구려가 4~5세기 평양천도를 전후하여 나라 이름을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국호변경까지는 아니지만 4~5세기 고구려는 고려란 나라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고려란 나라 이름을 주로 사용했다. 정리하면 고구려가 고려로 나라 이름을 바꾼 이후 궁예와 왕건 모두 ‘고려’란 나라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또 Korea란 영문 국호의 유래도 왕건의 고려가 아닌 고구려의 고려까지 앞당길 수 있다. 현 한국사 교과서는 주몽, 궁예, 왕건이 세운 나라 이름을 고구려, 후고구려, 고려라 하고 있다. 일반 한국사 개설서도 마찬가지다. 현 고구려-후고구려- 고려로 이어지는 계승관계를 통해서는 고구려가 ‘고려’로
정조의 남한산성 답사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지 4년째인 정조 3년(1779) 8월 3일부터 10일까지 7박 8일 동안 답사(?)를 떠났다. 답사를 떠나는 첫째 이유는 여주의 한 곳을 특별히 들릴 목적이었다. 정조는 여주에 행차하여 신하들과 세종릉[英陵, 영릉], 효종릉[寧陵 영릉], 보은사[신륵사], 청심루[송시열] 등에 관한 말을 나눴다. 이 가운데 어느 곳이 답사의 첫째 이유였을까. 지금은 여주하면 세종대왕릉과 신륵사가 대표적인 명소이지만 정조의 나들이 목적은 효종릉 참배였다. 1779년은 효종이 서거한지 120주년 되는 해였다. 지금은 1백 주년, 2백 주년이 큰 기념일이지만 예전에는 60년, 120년 등 60주기가 의미 있는 기념일이었다. 정조가 효종릉을 찾은 것은 인조-효종-현종-숙종-영조-정조로 이어지는 왕통의 정당성과 인조반정의 대의명분이었던 사대주의 ‘존명배청’ (尊明排淸)의 확인 작업이었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함께 봉림대군[효종]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 나중에 돌아와 소현세자 대신 조선의 왕이 된 효종은 지난날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를 물리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정조는 영릉을 참배하러 가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30] 활을 쏴라, 겉모습만 스님이다! 고려시대 일연 스님이 편찬한《삼국유사》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진성여왕(?)의 막내아들 양패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바다의 해적들이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활을 잘 쏘는 궁사 50명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배가 곡도(백령도)에 이르렀을 때 풍랑이 며칠간 크게 일어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사람을 시켜 점을 쳐보았더니 이 섬의 신령스런 못에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활 잘 쏘는 한 사람을 남겨놓고 가면 풍랑이 멈추고 순풍이 불 거라고 하였다. 50명의 궁사들은 제비로 남을 사람을 정하기로 했다. 나무에 자기 이름을 써서 물에 띄어서 가라앉는 사람이 남기로 했다. 당연히 모두 물 위에 뜨겠지 생각했는데 신기하게 ‘거타지’란 이름을 적은 나무만이 물속에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거타지를 남겨놓고 떠나니 바람이 순풍으로 바뀌었다. 거타지는 앞으로 이 섬에서 어떻게 지낼까 근신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나는 서쪽 바다의 신, 해약이요. 그런데 매일 어떤 중이 해가 뜰 때면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주문)를 외운다오. 그럼 우리 부부와 우리 자손들이 물속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36] 왜 일본은 우리를 무시하는가? 요즘 한일 관계가 뜨겁습니다. 위안부, 징용, 독도 등등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뜨겁긴 한데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양새입니다. 최근 일본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서술했습니다. 엄연히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인데 이웃나라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도 초등학교에 교과서에 실었으니 말입니다. 일본의 초등학생들이 커서 어른이 된다면 독도를 ‘무력’으로라도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웃나라가 우리 땅을 자기 땅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이웃나라를 철저히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왜일까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일까요. 역사를 한 번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5천 년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은 무엇일까요? 일본과의 싸움인 임진왜란이라고도 하고, 청나라에 굴복한 병자호란이라고도 하겠지만 압도적인 대답은 역시 일본에게 36년간 나라를 빼앗긴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5천 년 역사를 이어가다보면 이런저런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임진왜란처럼 방심하여 왕이 나라 끝 의주까지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34]나를 되찾는 한 해가 되었으면 과거를 되돌아보면 과연 나대로 살아왔나 반성해 봅니다. 내가 기준이기보다는 남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에 기준을 두고 살아오지는 않았나 생각해 보지요.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면 나는 없어지고 주변에서 만들어 준 나가 진짜 나인 줄 알게 됩니다. 우리 역사에도 그런 일이 수차례 벌어졌습니다. 우리 역사가 기준이 아니라 중국 역사가 기준이었고 중국 기준에 맞을 때 가치가 있다고 여겼답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직접 나서서 중국 기준에 맞추려고 하였지요. 그럼 역사를 통해 한 번 살펴볼까요? 첫째, 고조선의 마지막 왕은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입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을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라 했어요. 위만은 준왕을 몰아낸 찬탈 군주라고 하여 위만조선을 정식 왕조로 인정하지 않았지요. 우리는 조선시대까지 위만조선의 역사 대신 중국 기자조선의 역사를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정통으로 인정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위만조선을 인정하고 있답니다. 둘째, 고구려 연개소문의 성씨는 연씨이고 이름은 개소문입니다. 그런데 당태종의 아버지 이연과 한자가 같다고 하여 연씨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37] 원나라의 등장과 고조선, 일본의 등장과 대한제국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조선은 단군이 세운 조선을 말합니다. 대부분 이성계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를 붙였다고 알고 있지만 실은 기자조선 또는 위만조선보다 앞서 세워졌다고 해서 ‘고’를 붙인 것입니다. 또 ‘古(고)’에는 오래되었다는 뜻 말고 ‘고전(古典)’이나 ‘상고주의(尙古主義)’의 ‘고’처럼 ‘이상적인’이란 의미도 갖고 있답니다. 우리나라의 첫 나라이면서 이상적인 국가라는 의미의 ‘고조선’이란 나라 이름이 생기게 된 배경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바로 중국의 송나라가 멸망하고 이민족인 몽골(원)이 새로운 중국의 주인으로 바뀌어 가는 시기였습니다. 고려의 입장에선 예전에 요나라와 금나라의 침략과 압력을 받았지만 그래도 중국의 주인은 여전히 송나라였습니다. 따라서 한족의 송나라가 멸망하고 이민족의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은 지금까지 고려가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답니다. 우리는 흔히 일연의 《삼국유사》가 몽골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편찬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을 언급하고 단군신화를 실은 이유도 원에 대한 저항정신을 고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38] 가장 귀한 황금은 그대 익산 보석박물관에는 어떤 보석들이 전시되어 있을까. 혹시 선화가 서동에게 건넨 황금이나 서동이 쌓아둔 황금이 전시되어 있는 건 아닐까. 둘도 없는 절세미인 선화공주에 대해《삼국유사》에는 ‘짝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요염함(미염무쌍)美艶無雙’이라고 했다. 또 마를 캐는 한 소년이 한 나라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으니 그 소년의 총명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기록에는 ‘마음과 생각의 깊이를 측정하기 어려워 (기량난측)器量難測’이라고 했다. 선화를 꾀어낸 서동이 짐짓 앞으로의 호구책을 걱정하자 선화는 어머니 마야부인이 건네준 황금을 보여준다. 이것이면 평생 지낼 만하다고 하자 서동은 깜짝 놀란다. 이런 거라면 내가 마를 캐던 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했다. 서동과 선화공주는 많은 황금을 신라 진평왕에게 보내 인정을 받았다. 서동은 나중에 백제의 인심을 얻어 왕이 되었고, 둘은 옛일을 회상하며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사람들은 서동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정치 경제적 배경으로 익산의 황금을 들곤 한다. 그래도 똑똑한 서동이 어떻게 사람들이 몹시 좋아하는 황금을 옆에 두고도 몰랐다는 구조로 이야기를 이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