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잃은 남편들’

아내 잃은 남편들

 

수필이 가장 읽기 쉽고 그 다음이 소설과 시 그리고 다음이 희곡이다. 희곡은 가장 읽기 어렵고 불친절하다. 등장인물과 무대 배경을 입체적으로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말 한 마디, 몸짓 하나, 소품까지도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희곡을 읽다가 삼천포로 빠지기 쉽다.

 

 

《큰길에서》 안톤 체호프의 작품은 아내의 배신과 친척의 속임수로 대지주였던 ‘보르쏘프’가 선술집에서 보드카 한 잔을 구걸하는 신세로 전락하는 장면을 쓸쓸하게 그리는 내용이다. 러시아 제정 말기 대지주는 새로운 역할로 이행해야 한다. 과거의 작은 길에서 벗어나 이제 큰길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이다. 보르쏘프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인심을 베풀고 빚을 탕감해 준다. 그래서 자신보다 자신의 땅에 더 관심 많은 신붓감임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결혼식 날 결정적인 순간에 한 몫 챙겨 읍내의 변호사 애인에게 달아나고 만다. 선술집에는 보르쏘프와 같은 전철을 밟은 사내가 또 있다. 도끼를 들고 다니는 ‘메리크’란 부랑자가 그러하다. 그는 측은지심을 발휘해 보르쏘프에게 누울 자리를 양보하기도 한다.

 

보르쏘프는 보드카 한 잔이 마시고 싶어서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아내 사진이 든 보석함을 담보로 꺼낸다. 아내에 대한 상사병으로 폐인이 된 그는 아내 사진을 여러 사내들이 만지는 것조차 괴롭다. 그런데 메리크는 보석함을 발로 밟으며 아내를 저주한다. 보르쏘프는 기겁을 한다.

 

메리크가 양보한 자리에 누웠는데 공교롭게도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내가 선술집에 나타난다. 그리고 보르쏘프와 한 자리에 마주한다. 그는 반가워서 아내의 발치에 쓰러져 흐느껴 울며 매달린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벌레 보듯 하며 벗어나려고만 한다. 메리크는 갖고 다니던 도끼로 여자를 해치려 한다. 일촉즉발이다. 선술집의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여자를 떼어놓는다. 메리크는 여자를 죽이지 못했다고 비틀거리면서 “우울해! 정말로 우울해! 여러분, 나를 가련하게 생각해주세요!”라고 흐느끼면서 작품은 끝난다.

 

천둥 번개가 치는 밤, 자리가 부족해서 앉은 채 사람들이 눈을 붙이는 선술집에서 부랑자, 순례자, 나그네, 마부, 우체부가 초만원을 이룬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떠돌이들이다. 안톤 체호프는 어수선한 시절에 사랑을 잃고 우는 남자들이지만 이들이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기도 하면서 동병상련에 빠진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단막극으로 만들어 낸다. 겉으로는 떠나간 아내를 그리워하는 몰락한 지주의 모습을 처연하게 그린 듯하지만 속으로는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지주층이 자신의 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큰길은 매 순간 펼쳐진다. 지금은 지주나 농노가 따로 없다. 누구든 자칫 자리를 잘못 잡으면 한 순간에 붕괴된다. 그러나 잊지 말자. 그런 순간에도 측은지심을 발휘하며 내게 자리를 내주고 마룻바닥에 눕도록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나를 대신해 기꺼이 도끼를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30쪽 내외의 단막극 하나를 읽어내려고 온종일 낑낑대면서 체호프에게 새삼 머리를 조아린다. 체호프는 말한다. 아무리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AI 시대를 산다 해도 우리가 할 일은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면서 친절을 베푸는 일이라고.

 

의정부 효자고 국어교사 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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