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통영, 통영의 이순신 김한민 감독의 영화 <한산 : 용의 출현>이 한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 한산대첩의 현장인 통영에 다녀왔다. 통영이 초행은 아니었지만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난 직후였기에 감흥이 새로웠다. 통영은 이순신의 고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통영(統營)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의 줄임말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은 한산대첩 이듬해인 1593년 신설됐다. 충청과 전라, 경상도의 수군을 총괄할 각 수영(水營)의 상급 지휘부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산대첩 당시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로서 이억기의 전라우수영과 원균의 경상우수영 수군들을 아울러 지휘했다. 이순신 장군은 연합함대의 사령관격이었지만 이억기와 원균은 장군의 부하가 아닌 수평관계의 장수였다. 지휘체계의 결함이 불가피했다. 통제영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기관으로 1895년까지 존속했던 조선 수군의 총본부였다. 통제사는 종2품 관직으로 팔도의 도백(道伯)인 관찰사(觀察使)와 동급이었다. 외직으로는 최고위급이다. 역대 통제사는 모두 208명이었다. 초대 통제사는 한산대첩의 주역, 이순신 장군이 임명됐다. 통제사는 한산도에 통제영을 설치했다. 통제영이 지금의 자
골목길로 다니는 600년 울산 중심지 시계탑사거리는 울산 원도심의 핵심이자 상징이다. 시계탑이 이곳에 세워진 것은 1966년이었다. 이때만 해도 시민들에게 시각을 알려주는 기능을 담당했다. 그러나 점차로 시계 보급이 늘어나자 시계탑은 교통의 흐름을 방해하는 애물딴지로 전락했다. 그래서 시계탑은 1977년 철거되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시민들은 시계탑이 사라진 이곳을 여전히 시계탑사거리라 불렀다. 울산시민들 마음에는 시계탑이 좀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시계탑은 1998년 다시 세워졌고 2015년 재조성됐다. 울산시민들에게 시계는 필요 없어도 시계탑은 필요했다. 울산 원도심의 원형은 조선시대의 울산읍성이다. 울산읍성은 조선 성종 때인 1477년 축성됐다. 연구결과들에 따르면 울산읍성의 남문은 시계탑 남쪽 보세거리 옆에 있었다. 북정동 울산 기상대 자리 부근에 북문이 있었고 장춘로 동편에 동문, 서편에 서문이 있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울산읍성은 헐렸다. 왜군은 읍성의 성돌들을 가져다 울산왜성을 쌓는데 썼다. 읍성은 전란 이후에도 복원되지 못했다. 하지만 성벽이 있었던 자리는 누구도 사사롭게 쓸 수 없었다. 언젠가는 다시 성을 쌓아야 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