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for all” - “All for one” “10년 후에도 둘 다 싱글이면 결혼할까?” “글쎄?” 술자리에서 말한 농담 반섞인 대화가 현실이 되어 10년 후, 우린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상사에서 근무했던 저는 영어하고는 거리가 멀어 평소 관심을 갖고 있었던 일본에 유학하기로 결심했었죠. 부모님과 형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1년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습니다. 무섭고 두려움 같은 것은 별로 없는 성격이라 누구와도 거리낌 없이 사귈 수 있었어요. 일본 유학생활은 신났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남편도 만나게 되었죠. 저의 일본어 선생님! 그때는 정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서로 도와주는 관계였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의 유학이 끝나고 귀국 한 저는 대전 엑스포에서 근무했죠. 때마침 한국여행 온 남편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저 또한 일본으로 출장 가게 되면 연락해 이런저런 사람 사는 이야기도 주고받았죠. 서로 사이는 가까워졌지만 인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쯤, 저에게 한국을 떠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IMF라는 금융위기와 더불어 친구 소개로 큰 마음먹고 시드니로 출발했지요. 그곳에서 일본과 한국여
생명의 기쁨, ‘라파엘’ 드디어, 칠레에서 3대를 이루다! 작년 12월 28일 딸 다연이가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손자가 태어나든, 손녀가 태어나든 성별에 상관없이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젊은 시절 딸 하나, 아들 하나 이렇게 둘을 키우면서 느낀 점은 딸 키우기가 아들 키우기보다 쉬웠다는 점이다. 그래서 딸의 즐거운 육아생활을 위해서는 손녀이길 바랬는데 손자가 태어난 것이다. 우려와는 달리 태어난 손자 ‘Rafael’은 무척 순하여 안심이 되었다. 그렇다. 신생아 손자 라파엘은 아빠가 칠레사람이다. 1992년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생활을 할 당시 한국교포들의 상당수가 간호사였다. 간호사들의 대부분은 남편이 독일 사람이었는데 한국 출신 간호사들이 신부감 1위라는 말을 들었었다. 이 한국 출신 간호사들이 동생이나 친지를 독일로 불러들여 독일유학을 시켰다고 한다. 공부를 마친 유학생들이 한국으로 돌아가 분명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본다면 마땅히 훈장을 드려야 할 분들이 파독 간호사이다. 상황은 이러했지만 국제결혼이기에 애잔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잣대도 없었고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하고 혼자 이 생각 저 생각을 했던 시절이었다. 어쨌거나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