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인간, 건축을 생각하다. 소리를 짓는 이형호 건축가 한국의 마당문화, Open Stage K, ‘사운드포커싱홀’ 그동안 우리나라의 공연장은 정동극장에서 출발해 서양극장 형태의 실내위주로 발전해왔습니다.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지자체 예술회관 등이 그 예들이죠. 실제적인 관객과 예술가의 접점이 일어나야 할 공연장이 이렇게 실내에 있다 보니 특권층, 매니아층, 예술가의 가족 등으로 관객이 한정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원래 우리나라의 공연은 야외에서 주로 이뤄지는 마당문화였죠. 마당에서 판소리, 창, 퍼포먼스 등 모든 것이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졌습니다. 유럽에서도 원형광장, 극장들이 야외에 있어 자연스럽게 일상의 삶속에서 공연들이 펼쳐지므로 어린 시절부터 버스커나 예술가들과의 접합이 이루어지게 되었죠. 지금 우리나라는 유독 이 부분이 사각지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간을 통한 소리 건축’이라는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사운드포커싱홀’입니다. 무대가 야외를 중심으로 오픈 되어 예술가들, 일반 사람들, 관객들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밀물과 썰물처럼 서로 교류가 일어나고 새로운 문화형태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버전의 야외 공연장,
군대에서 ‘기술사’와 22개의 자격증을 딴 군대 공신 안장원 교관 군에서 일할 생각 1도 없었던 나! 군에 발을 들여놓다 제 고향은 광주 인근의 시골마을입니다. 민주화운동, 학생데모 등을 보고 자랐던 저이기에 군에서 일할 생각은 1도 없었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2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공장, 공사현장 등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1998년 IMF 시절 입대 영장이 나와 고민하던 저에게 옷 장사를 하며 알게 된 사장님이 직업군인인 부사관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사장님은 힘들더라도 군에서 알뜰히 저축하면 전역 후,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큰 밑천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셨습니다. 그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저는 병무청을 찾아가 바로 지원서를 냈고, 그렇게 저의 군 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나를 발견하다 해병대에 입대하고 동료들과 똑같이 머리를 밀고, 옷도 군복으로 입고, 다들 제로선상에 서서 시작하는 그 시점에 깨달은 게 있었습니다. 제가 머리가 똑똑한 것도 아니고, 운동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가정형편이 나은 것은 더더욱 아니고, 좋은 친구,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닌, 너무 평범하다 못해 더 낮은 나인데 스스로
나는야! 서예 영업사원 캘리그라퍼 ‘김도임’ 작가 어린 시절 유독 잡생각이 많았던 아이 저는 어렸을 때 너무 생각이 많아 괴로울 정도였습니다. 아마 지금이라면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했을 것 같지만 당시에는 그런 의식이 별로 없었죠. 그냥 ‘나는 이런 애인가 보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엄마말로는 제가 어렸을 때 그림을 곧잘 그렸다고 해요. 바로 위의 언니는 그림을 그릴 때 선을 찔끔 찔금 그렸던 반면, 저는 과감하게 그렸다고 하더라고요. 원래 엄마도 미술학과를 가려고 했는데 외할아버지의 반대로 의상디자인을 전공하셨어요. 엄마는 잡생각이 많은 저에게 도움이 되도록 피아노, 그림, 서예 등을 하게 하셨죠. 10살, 서예에 완전 빠지다 10살 때 즈음 서예학원을 처음 갔는데 이때 완전 서예에 빠져버렸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은 저였지만, 서예를 할 때는 잡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다른 생각을 하는 순간 화선지에 먹이 번지고 글씨가 잘 써지지 않으니까요. 완전 글쓰기에만 집중을 해야 했는데, 그래서 더 빠져들게 된 것 같기도 해요. 피아노 학원도 같은 건물에 있었지만, 피아노는 30분 정도 뚱땅거리고 도망치듯 서예학원으로 달려갔어요.
비보잉에서 무용가로, 진정한 ‘춤추는 사람’을 꿈꾸는 차종현 안무가를 만나다 춤으로 대학을 갈수 있다고? 대한 진학을 앞두고 전공으로 사회체육학과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때 친구들과 어울리며 취미로 시작했던 비보잉을 더 잘하고 싶어 재즈학원을 다녔는데, 그곳에서 무용으로 대학을 갈수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죠. 어떤 대학을 가야하는지 알 수 없어 인터넷을 검색하며 알아보니 각 대학마다 현대무용, 고전무용, 발레 등 다양한 춤을 배울 수 있는 무용학과가 있더군요. 당시에 체육보다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춤에 더 집중할 생각으로 고3 여름, 스스로 진로를 결정했습니다. “다짐한 만큼 이뤄내 봐라!” 사실 예체능을 하려면 어느 정도 집에서 지원이 가능해야 하는데, 집 형편은 넉넉하지 않아 부모님에게 기대기는 죄송한 상황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리라 마음먹고 부모님께 저의 진로를 말씀드렸습니다. 부모님은 하고 싶은 일은 부모를 설득해서라도 하고 마는 저를 아셨기에 “네가 다짐한 만큼 이뤄내 봐라” 하시며 흔쾌히 허락해주셨어요. 그리고 최선을 다해 제가 무용을 하도록 응원해 주셨죠. 제가 밤을 새며 차가 다니지 않는 늦은 시
13번 공정으로 꽃 피운 얼음 꽃, 빙사과(氷沙菓) 장인 ‘홍성란’을 만나다 제2의 고향, 강원도 영월 저희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안성에서 정미소와 방앗간을 했습니다. 아버님은 집안의 장남으로 인물이 훤하시고 마음도 좋아 사람들이 잘 따랐어요. 그러다보니 유혹도 많아, 그 많던 재산을 다 탕진하고 결국 강원도 영월로 가셔야 했죠. 영월엔 작은아버지와 고모가 사셨는데, 아버지는 거기서 다시 방앗간을 시작하셨습니다. 제 기억에 의외로 음식솜씨가 좋으셨던 아버지와 음식솜씨가 남달랐던 고모 덕에 그곳에선 항상 먹을 것이 풍부했어요. 강원도 영월은 저에게 제2의 고향이랍니다. 우리 고모는 동네 ‘과방장’ ‘과방’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한마디로 ‘과자방’이죠. 음식 솜씨가 좋으셨던 고모는 특히, 정교한 음식을 잘 만드셨어요. 예전에 동네에서 잔치를 하면 한달 전부터 준비를 위해 광이나 방을 정해 ‘과방’을 차립니다. 항상 고모가 ‘과방장’이 되셨죠. 차려진 과방에는 아무나 못 들어가는데 저는 어리기도 했지만 그냥 통과 했어요. 이곳에서 여러 음식도 많이 보고, 약과와 과즐(과줄의 옛말로 순 우리말, 꿀과 기름을 섞은 밀가루 반죽을 판에 박아 모양을 낸 후 기름에 지진
[황혼과 여명 : 서양문화(명)를 깊이 아는 방식의 하나로서 서양에만 있는 자화상 탐구 5] 서양 최초의 자화상 회화전통을 창조한 알브레흐트 뒤러의 자화상 (4) 동양의 ‘직업’ (職業 Job)과 서양의 ‘소명’ (부르심, 召命, Calling, Beruf) 사람이 하는 일을 세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먹고 생존하기 위해 하는 일’로서, 이것은 일반 생물이 하는 행위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둘째, 조금 발전된 형태로‘일정한 사회 속에서 정해진 직분을 행하여 그 사회(단체,공장 등)가 유지,발전되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무리를 지어 사는 다른 곤충(벌,개미)이나 짐승(늑대,고래)의 행위와 유사합니다. 셋째, 언젠가는 끝날 나의 생존이나 오래가지 못할 사회의 유지보다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일’로 이것은 인간만 할 수 있는 겁니다. 나의 생애는 언젠가는 짧게 끝나고 말지만, 그 짧은 찰라를 사용하여 절대자가 인정할만한 영원한 가치를 남긴다면 최고의 생애를 보내지 않겠습니까? 상대종교의 동양사회 속에서, 또 매우 고통스러운 현실(조선말기의 부패, 일제의 수탈, 한국동란) 속에서 오래 살았던 우리들에게는 대체로 첫째와 기껏
서양 최초의 자화상 회화전통을 창조한 알브레흐트 뒤러의 자화상 (3) |자화상과 자기정체성 확인하는 전통에서 탁월한 서양임을 깨끗이 인정합시다! 지난 두 번의 글을 통해 우리는 뒤러의 자화상에 대해 탐구하고 있는데. 자화상 혹은 자화상을 만들었던 화가들 자체가 탐구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목적은 ‘동양에는 없었던 자화상을 만드는 전통이 왜 서양에만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과 우리 신문의 [황혼과 여명] 시리즈에서는 동양은 뒤떨어지고 서양은 탁월하다는 선입견에서 출발하지는 않습니다. 또 정반대로 서양문화(명)의 한계에 도달한 지금이야말로 동양문화(명)의 탁월함이 나타날 시점이라는 의미에서도 나가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화상 전통이 없었던 동양에 비해, 그것이 오랫동안 존재했으며 지금도 있는 서양이 탁월하다는 현실은 인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런 자화상을 만들려는 심리 깊은 곳에 인간이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애쓴 서양이, 그런 것이 없었던 동양에 비해 낫다는 사실을 깔끔하게 인정하자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양의 모든 것이 서양에 열등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더 뛰어난 것도 많이 있는 것은 분명
서양 최초의 자화상 회화전통을 창조한 알브레흐트 뒤러의 자화상 (2) - 예비적 탐구 - 자화상 있는 서양문화 vs. 자화상 없는 동양문화 서양문화(명)와 동양문화(명)를 탐구하는 근본적인 프로젝트인 [서양문화(명)의 황혼과 새문화(명)의 여명]이라는, 10여년 이상으로 진행한 거대한 칼럼의 일부로서, 우리는 서양문화(명)에만 있는 독특한 현상인 자화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동양문화(명)에서는 없는 서양문화(명)만의 독특한 현상이 자화상 그리는 전통이라는 점은 너무나 현저합니다. 이 글을 쓰는 동양인인 저는 비록 화가가 아니지만, 만약 잘 훈련받은 화가로서 자화상을 그리겠느냐고 묻는다면, 긍정적인 답을 주기가 매우 어색한데 다른 동양인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현대 동양의 화가들 중에서 서양화의 영향을 받아서 자화상을 심지어 나이에 따라서 꾸준히 제작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화가임과 아님과 상관이 없이 내가 내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나의 실체,근본을 파악하려는 태도 자체는 비동양적이어서 아주 어색합니다. ‘내가 나를 그리는’ 자화상 제작이 동양인에게 매우 어색한 이유는,‘나의 무엇을 그리지?’, 더 깊게 들어가서‘나는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