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기쁨, ‘라파엘’ 드디어, 칠레에서 3대를 이루다! 작년 12월 28일 딸 다연이가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손자가 태어나든, 손녀가 태어나든 성별에 상관없이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젊은 시절 딸 하나, 아들 하나 이렇게 둘을 키우면서 느낀 점은 딸 키우기가 아들 키우기보다 쉬웠다는 점이다. 그래서 딸의 즐거운 육아생활을 위해서는 손녀이길 바랬는데 손자가 태어난 것이다. 우려와는 달리 태어난 손자 ‘Rafael’은 무척 순하여 안심이 되었다. 그렇다. 신생아 손자 라파엘은 아빠가 칠레사람이다. 1992년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생활을 할 당시 한국교포들의 상당수가 간호사였다. 간호사들의 대부분은 남편이 독일 사람이었는데 한국 출신 간호사들이 신부감 1위라는 말을 들었었다. 이 한국 출신 간호사들이 동생이나 친지를 독일로 불러들여 독일유학을 시켰다고 한다. 공부를 마친 유학생들이 한국으로 돌아가 분명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본다면 마땅히 훈장을 드려야 할 분들이 파독 간호사이다. 상황은 이러했지만 국제결혼이기에 애잔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잣대도 없었고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하고 혼자 이 생각 저 생각을 했던 시절이었다. 어쨌거나 내
미국에서 온 나디아와 마리사의 한옥살이 한국어는 어렵지만! 아침마다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대문을 나가던 나디아와 마리사의 목소리가 한옥 마당을 가득 채웠다. 2022년 미국 국무부 청소년문화교류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에 오게 되었다. 40일간을 우리집에서 홈스테이로 지내다 돌아가니 더 이상 이제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을 어려워했다. “ ~에 갔다 오겠습니다!”보다는 “ ~에 다녀오겠습니다.”로 말하는 것이 더 예의 있는 듯해서 가르쳐 주었지만, 한참을 설명해야 했다. 어른들께는 존댓말로, 때로는 자기를 낮추는 말 등이 있다는 것과 한자에서 온 말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우리가 영어를 할 때 발음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몰라요”를 “모라요”로 받침이 있는 것은 잘하지 못했다. 그리고 쌍디귿과 쌍비읍 등 경음 발음하는 것도 어려워했다. 우리말을 외국인이 배울 때는 이리도 어렵구나! 한국어와 한국문화 즐겁게 배워요! 나디아는 미시시피주에서 왔고, 마리사는 인디애나주에서 왔다. 딸 유진이와 비슷한 또래여서 같이 지내면 서로 도움이 되겠다 싶어 홈스테이 코리아에 신청을 해서 오게 되었다.
칠레 문방구 칠레수도 산티아고의 문방구는 손님의 대부분이 성인이다. 학생들이 학용품을 직접 사는 법이 거의 없고 대부분 부모들이 사다 준다. 거의 엄마들의 몫이다. 때문에 문방구의 분위기가 여성적이다. 물론 직원들도 여성들이다. 남자직원을 그간 네 명 써보았는데 그 중 딱 한 명만 훌륭했고 나머지는 근면, 성실 부분에서 죄다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남자직원을 뽑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여름방학 때 잠깐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남자직원들은 문제가 없었다. 이렇게 엄마들이 주로 고객이다 보니 수를 놓거나 꿰매거나 하는 반짇고리, 가정용 소품도 가져다 놓고 팔게 된다. 그러다 보니 문방구가 점점 부피가 커져 나날이 복잡해진다. 신기한 것은 가짓수가 많아지더라도 경력이 쌓여서인지 그닥 끔찍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리 끔찍하지는 않게 여겨지기까지가 22년이 걸렸지만 말이다. 회상 23년 전 칠레에 도착했다. 무엇으로 먹고 살아야할지 막막했다. 옷 장사를 해야 했지만 어렵겠다 싶어 선뜻 나서지 않았다. 교민의 대다수가 옷 장사를 했기 때문에 노하우를 전수 받으려면 옷 장사뿐이었는데 문제는 자금이 필요했다. 별 수 없어 우리 부부는 맞벌이를 했다. 나는 적응이 더뎌
한옥 유진하우스에서 에스토니아인들과 금(金), 금치체험을! “Tere päevast! (테레 파바스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인사말 “어서오세요! 유진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처음 만나면“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하는데, 한 번 해볼까요?”했더니, 모두들 서투른 발음으로 안녕하세요?를 제각각의 억양으로 말한다. 그래도 잘 했다고 칭찬을 해 드렸다. 그럼 “에스토니아어로는 어떻게 말하나요?” 물었더니, “Tere päevast! (테레 파바스트!)” 라고 한다. 아이구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인사말이었다. 어슬프게 따라 했더니 다시 발음을 한 번 하신다. 그들의 귀에 거슬리는 발음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다른 나라 사람들의 간단한 인사를 따라하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다. 말을 배우는 것은 단순히 단어 몇 마디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배워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여행을 온 분들이 한국 음식에 관심을 가져주다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우린 김치 안 먹고 살아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인 김치가 코로나를 겪으면서 세계 사람들에게 더 인기가 많아졌다. 그런데 우리는 외국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일본 학교 앞에는 왜 분식점이 없을까? 학창 시절 추억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새삼 생각해 보았습니다. 분식점과 도서관이 금방 떠오르더군요. 그런데 일본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좀 놀랐던 것은 학교 앞에 분식점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학교 내의 매점도 존재하지 않죠. 특히 학교에는 돈과 시계 등을 가지고 가면 안 됩니다. 즉 귀중품을 소지하지 못하고 개인 소지품 또한 가져가면 안 되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빈부 격차로 인해 아이들이 힘들어 할 수도 있는 정서를 고려한 것이라는 겁니다. 심지어 교과서도 교실에 절대 놓고 다니면 안 되었지요. 그래서 아이들은 총 11kg나 되는 가방(여행가방 사이즈)을 매일 들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 이유 또한 학교에 놓고 다니면 도난사고나 다른 아이들이 자기 물건에 낙서하고, 물건을 빼앗으며 놀리는 이지매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랍니다. 이렇듯 돈을 가지고 다니지 못 하니 학교 근처에 분식점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거리에서 손에 먹을 것을 들고 걸어 다니는 것 또한 허락되질 않았습니다. 위생상 좋지 않다는 것이죠. 일본의 학부모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당연한 것처럼 생각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초·중
[세계속의 한국인] 나만의 대만 살이! (2) 직장생활에서 개인사업을 꿈꾸다 22년 전, 반도체 장비를 판매하던 한국 회사에서 대만 신주(新竹)지사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직장 생활을 타이완에서 시작하기 전에는 주로 배낭여행이 전부였답니다. 대만에서도 IT산업과 전자산업의 메카인 신주(新竹)는 대만의 경제 부흥의 1번지였지요. 타이완 모든 지역에 지진이 나더라도 신주(新竹)만큼은 나면 안 된다는 곳일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반도체 산업은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 기술이 전부였거든요. 간혹 한 두 업체 정도 Made in Korea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니, 찾아봐야 했어요. 왜냐면, 제가 거주한 신주(新竹)는 한국으로 치면 경기도 수원 또는 화성이었거든요. 생산지였지만 소비지가 아니였던 만큼, 타이페이(수도)로 나오지 않으면 거의 없었지요. “Who are you?”, “Which company?” 5년간의 대만지사 근무를 마치고, 한국 본사로 복귀하지 않고 운 좋게 TFT-LCD 회사의 대만지사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반도체 장비와 LCD 장비 회사에 7~8년간 근무를 하면서 서서히 개인사업에 눈을 뜨기 시작했지요. 글로벌 전자산업의 중심 중 하나
[세계속의 한국인] 나만의 대만 살이! (1) 타이완, 타이페이, 타이랜드 뭐가 다르지? 아무리 글로벌한 시대라고 해도 타국에서 자리 잡고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게다 온 가족을 이루면서 말이죠. 무엇보다 2세대들의 정체성과 교육 문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 순애보로 시작해 대만에 코를 꿰어 22년 동안 살며 새로운 것을 접하는데 두려움을 없애고 매번 인생은 무한도전이라 생각하고 대만에 정착한 분이 있습니다.‘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독자들을 위해 현재도 진행형인 대만살이의 희노애락을 3회에 걸쳐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너 그것 한 번 신청해봐!” 25년 전, 대학4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교내 게시판 글에 눈이 확 뜨였습니다. 곧장 같은 기계과 동기 ‘수기신’와 함께 학과사무실을 방문했죠. 마침 조교선생님과 행정사무원들이 있더군요. 조교선생님에 “학과사무실에 붙은 내용이 뭐에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응, 너 그것 한 번 신청해봐!”라고 한마디를 던졌는데 순간 저는 잠시 짧은 시간이지만 엄청 깊고 뭔가 저를 응원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평소 영어에 자신이 없었던 저는 졸업을 앞두고 영어 학점도 이수할 겸 신청해야겠다고 바로 마음을
하루를 두 번 사는 여자 고등학생인 큰 아이는 새벽 6시 반이면 스쿨버스를 탄다. 덕분에 나의 하루도 꼭두새벽부터 시작된다. 아침잠 많은 나로서는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지만, 어찌 됐건 식빵을 구워 치즈와 햄을 올린 샌드위치로 도시락을 싸고, 아이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그러는 중에 중학생인 딸아이도 잠에서 깨어 돌아다닌다. 하지만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나 도시락과 아침을 미리 준비해 놓고 내가 먼저 수업을 위해 방에 들어간다. 새벽 여섯 시, 혹은 일곱 시, 때론 여덟시. 나는 강의를 듣기도 하고, 토론에 참여하기도 하고, 내가 강사로서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무슨 새벽부터 수업인가 싶겠지만 사실이다. 내가 참여하는 수업들은 거의 다 줌 그리고 한국,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새벽은 그들의 저녁, 나의 아침은 그들의 밤이다. 나는 하루를 두 번 혹은 세 번 사는 여자다. 나의 하루는 새벽에 한국과 한번, 현실로 돌아와 미국과 한번, 오후 세시 반쯤 한국의 새벽과 한번 이렇게 몇 번을 새로 시작한다. 오전 7~8시쯤 강의를 듣거나 수업을 하고 한국에 있는 그들과 굿나잇 인사를 나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배달된 물품들 코이카-NGO 봉사단 파견 보따리 커다란 택배 상자 하나가 집으로 배달됐다. 누가 보냈을까 의아해하며 수신자로 내 이름이 적힌 박스를 조심스레 뜯었다. 코이카 엔지오 봉사단으로 파견 가는 단원에게 전달된 물품이다. 이민 가방에 담긴 품목 하나하나를 꺼내 살피니 파견기관의 세심한 정성이 녹아있다. 비상약품 세트와 긴급 재난 사항을 대비해서 꾸린 안전물품 배낭 외에도 의류와 수저세트 등의 물품으로 가득했다. 텀블러와 코로나 키트 챙 넓은 모자는 현지 생활에선 없어서는 안 되는 쓰임새 많은 용품이라 기관의 배려가 더욱 뭉클하게 다가왔다. 물품을 받고 나니 파견이 코앞이라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제 며칠내로 한국을 떠나 르완다로 나가는구나.’ 졸지에 5방의 예방주사를 한꺼번에 접종하느라 왼팔과 오른팔에 나눠 맞았던 자국에서 후끈한 기운이 전해졌다. 12월 3일, 온라인으로만 만나왔던 파견 단원들은 파견식 행사를 위해 명동의 유스호스텔에 모였다. 파견식 행사를 진행하는 KCOC(Korea NGO Council for Overseas Development Cooperation,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관계자들은 따뜻한 마음으로 봉
지금 칠레는 찜찐다 4일전 칠레 산티아고시의 기온은 37도로 엄청 더웠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은 한 달 뒤이니 그만큼 깜짝 놀랄 기온이었다. 기상학자들이 예측하기로는 40도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한다. 40도라는 기온 40도… 섭씨 40도의 기온을 피부로 직접 느껴본 곳은 18년 전 브라질의 이구아수 공항에서였는데 습도 높은 기후에다가 푹푹 찌는 열기가 코로 들어올 때 호흡곤란의 지경이었다. 아무튼지 간에 사람 못살 곳이 이구아수구나~ 했지만 집집마다 냉방시설이 갖춰져 있어서 별일 없이 잘들 사는 분위기였다. 요즘은 냉방시설에 어떤 가스를 쓰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만 해도 모든 냉방기구엔 아르곤 가스를 썼을 때였다. Argon 가스가 지구온난화에 한 몫 한다는 말을 들었으니 더워서 부채질, 선풍기, 에어컨으로 진화한 것에 대해 인간의 지혜를 마냥 높일 수만은 없게 되었다. 우리 동네는 남의 나라 말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칠레 우리 동네상황으로 보자면, 난리가 아니다. 물난리 말이다. 각 지역 자치단체들은 나날이 줄어가는 물 자원 확보에 골치를 앓고 있다. 우리 동네는 다행히도 안데스산맥에서 내려오는 눈 녹은 물을 잘 정수시켜 공급하고 있다. 물론 물을 가둬 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