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전칠기의 아름답고 찬란한 세계를 보여주는 ‘휘향찬란’ ‘휘향찬란’ 나전칠기는 다양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조개마다 가진 다른 무늬, 빛깔, 패턴이 있기 때문이죠. 빛에 따라 아주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 빛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휘향찬란’을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길을 향한 도전 사실 몇 해 전까지 저는 회사에서 회계 관련 일을 하던 3년차 직장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는 동안 이 일이 나에게 맞지 않다는 생각을 마음 한편에 항상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나에게 딱 맞는 직업을 찾기 위해 베이킹, 가죽공예, 코딩, 일러스트, 포토샵 등 다양한 분야를 시도해보았습니다. 그러다 나전칠기를 정식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을 알게 되어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명장님들께 많은 조언과 사업적인 멘토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문화재수리기능사라는 자격증을 취득하고, 내가 만든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싶어 프리마켓을 종종 나갔었는데, 그때마다 찾아주는 분들의 많은 응원과 관심 덕분에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원데이 오프라인 클래스, 온라인 클래스로 나전칠기 귀걸이, 머리핀, 키링, 그립톡, 커스텀 제품들
[전문농업인을 꿈꾸는 청년 농부이야기] ‘베 리 테 마 파 크’ 를 꿈꾸며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접한 농업 초등학생 때부터 감나무와 사과나무를 키우시던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조금씩 해오던 저는 고등학생 때 큰 고민 없이 농업분야로 진로를 정했습니다. 물론 중학생 때에는 주말마다 농장 일을 돕는 것이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농사는 못 짓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요. 부모님이 노지에서 농사짓느라 항상 땅에 무릎 꿇고, 허리 숙여 일하시는 것이 많이 힘들어 보였는데, 농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찾아보니 스마트팜이라는 것을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식물에 대해서만 잘 알고, 재배 관련 공부를 열심히 하면 딱히 힘 들이지 않아도 기계들이 알아서 잘 해줄 것만 같았거든요. 하지만 농대생 3년차, 스마트팜의 현실에는 제가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이 훨씬 많이 숨어있음을 온 몸으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전문농업인이 되기 위해 지금은 열공 중 저는 영농창업전형으로 대학교에 입학해서 원예학과와 영농창업사업단 수업을 복수전공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충남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에는 다양한 전공들이 있지만 농대는 대표적으로 식물을 공부하는 원예학과,
[친환경 동네가게 제로에이블 스토리] ZERO(제로웨이스트) + ABLE(가능하게 하다) ZERO : ABLE덜 만듦으로, 미래를 더하다! 무심결에 쓰던 플라스틱 양에 깜짝 놀라, 시작된 환경에 대한 관심 직업상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하면서 제가 매일 사용하고 버리던 생수병, 즉석음식 1회용 용기들을 보고 문득 ‘나 혼자 쓰는 것도 이정도인데 하루에 버려지는 양은 얼마나 될까?’라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그린피스에서, 가정에서 사용하는 플라스틱 종류와 그 양에 대한 조사를 하는 캠페인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죠. 매일매일 사용하는 음료수 병, 햇반 등 모든 플라스틱을 일일이 리스트에 적다 보니 생각보다 사용량이 엄청나다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무심결에 쓰던 플라스틱을 제 자신 스스로 자각하게 된 것이죠. 그때부터 제로웨이스트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환경과 지구관련 공부도 하고 책도 찾아보며, 그렇게 3년을 준비하고 ‘제로에이블’을 시작하였습니다. 제로에이블 안에서 먼저 하나 되기 현재 제로에이블은 저까지 총 5명의 파트너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작년 7월부터 본격적인 매장 오픈을 준비하면서 함께하게 되었죠. 그 과정에서 같은 생각으로 제로에
세계! 한옥의 매력에 빠지다 어릴 적에 초가집에 살았다. 방이 두개, 부엌 한개가 있었으니 말 그대로 초가삼간이었다. 다행히 쓰러질듯한 오래된 초가는 아니었다. 마을이름도 ‘웃마’였다. 윗마을을 줄여서 그렇게 부른 듯하다.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힐링촌으로 손색이 없을듯하지만, 아쉽게도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살아온 인생 중, 서울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쉽사리 서울 사람이 되어지지가 않았다. 낯선 곳에서 살아보고 싶어 일본과 중국에 가서 이방인으로 살아보기도 했다. 어디를 가나 시골정서는 내 삶을 늘 따라다녔고, 잃어버린 고향을 찾고 싶은 마음이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2009년 다시 서울로 돌아오면서 조상의 숨결을 느끼는 혜화동 한옥에서의 삶을 선택했다. 한옥 게스트하우스를 10여 년 운영하면서 지내왔다. 세계에서 왔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나는 혜화동 한옥에서 세계 여행한다》를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도시를 소개해 달라고 하면 늘 경주를 추천해 주곤 했다. ‘2021 한옥문화박람회’가 [한옥, 공간을 연결하다]를 주제로 11월 12일부터 14일까지 경주 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린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
봉고차 타고 ‘찾아가는 옷 수선’하는 그 날까지, 술람미 홈패션 고고씽! 한복 기술자로의 입문 저는 충남 홍성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결혼하고 평범한 주부로 지내는 어느 날, 큰 언니가 한복 기술을 배워 보라고 권유를 하더라고요. 큰언니와 오빠가 광장시장에서 한복 기술자로 작은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광장시장은 한복거리로 호황이었어요. 골목골목 작은 판자촌으로 이루어져 2층엔 포목점들이 즐비했고, 3, 4층에는 한복 만드는 기술자들이 성냥갑처럼 작은 공간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저는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보태겠다는 마음에 안산에서 종로까지 출퇴근하며 한복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죠. 3개월을 배우고 한복 일감을 받아 집에서 일을 하다 보니 일이 점점 많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광장시장에 한복 가게를 임대해 11여 년 정도 한복 치마와 저고리를 전문으로 일을 했습니다. 한참 결혼 성수기 때면 잠을 못 자고 의자에 앉아 졸면서 일을 하기도 했다니까요. 눈을 감았다 뜨면 하루가 번개같이 지나는 하루하루 속에서도 한복 만드는 일이 재미있었습니다. 옷 수선 전문가로 다시 시작 2000년대에 들어와서 한복 시장은 하락하기
[땅을 살려 작물을 거두는 뿌리애농장 이야기] 토양을 강하게 하는 미생물로 먹거리를 살리는 뿌 리 애 농 장 귀농으로 시작된 뿌 리 애 농 장 모든 작물의 기본은 뿌리! 저희는 이 뿌리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뿌리를 사랑하는 농법을 지향하는 마음으로 뿌리애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뿌리애농장의 시작은 7년 전 창녕군에서 오래 농사지으신 시부모님의 농장에 저희 부부가 귀농하면서부터입니다. 귀농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초기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초반에 내 사업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기까지 버티기 위한 자본과 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청년 농부, 혹은 신규 농업인들은 자신의 자금을 농업 기반 마련하는 것에 투자하기 때문에 매달 들어가는 일정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희도 아이 둘과 함께 4인 가족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이 처음에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청년 농부와 관련하여 지원 자금이 나오기도 하지만 7년 전에는 농업 분야에 생활을 유지해주는 지원 사업이 없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규 농업인이 해결해야하는 부분이었죠. 또 농업이라는 것이 한 해 농사를 짓
[따뜻한 농업법인 농바름 스토리] 바른 먹거리, 바른 사람을 키우려는 농업법인 ‘농 바 름’ 강 행 원 대표 고향의 집과 땅을 지키러 다시 돌아오다 직장생활을 하던 중, 2004년경 빚으로 무안 고향집과 땅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했습니다. 급하게 대출을 받아 집과 땅을 지킬 수 있었죠. 그렇게 마을에 돌아왔을 때는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고 봉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마을 사업을 시작했었습니다. 마을이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애도 많이 썼는데, 어느 순간부터 저를 시샘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들으며 마음고생을 하다, 마을 사업 일은 그만두고 지금은 2년 전부터 19명의 7가정과 함께 농업법인 ‘농 바 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법인은 기존의 농사지은 분들이 아닌 모두 초짜 귀농하신 분들입니다. 기존에 이미 농사를 지었던 분들은 자기 생각들로 꽉 차 있어 새로운 것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처음 농사짓는 사람들은 배우면서 농사짓는 것도 힘들지만, 판매처가 없어 고민입니다. 그러니 각자 새로운 꿈을 꾸고 시작은 하지만 막상 시골에 정착하기가 매우 힘들지요. 우리 법인에서는 1
[김원천의 건축이야기 1] 우리 집에 한옥(韓屋)이 들어왔다 사람들에게 한옥 짓는 일을 한다고 말하면 가끔 “소장님은 어디 사세요?, 한옥에 사시죠?”라고 묻는다. 그때마다 나는 “한옥사무실에서 일해요. 그리고 한옥호텔을 운영해요.”라고 동문서답하듯 사는 집은 한옥이 아님을 넌지시 알린다. 그렇게 부끄러울 일이 아닌데 대답을 피하는 것은 낡은 빌라에 살기 때문이다. 회사를 차리고 사무소에서 가까운 곳에 얻은 집은데 한옥에 살고 싶었으나 비싸서 당시에는 살 엄두를 못 냈다. 한옥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실제 살고 싶냐 물으면 추위, 공사비용, 유지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살기는 쉽지 않다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나도 한옥을 짓는 일을 하면서 한옥관리의 노하우를 알기 위해 한옥호텔을 운영하고, 일하는 사무실도 한옥을 고쳐 8년 이상 경험했지만 온전히 내가 사는 집이 아니기에, 건축주들에게 한옥집의 경험을 제대로 드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살고 있던 빌라의 임대기간이 만료되어 집을 알아봐야 했는데 여전히 도심의 한옥을 매입하거나 땅을 사서 한옥을 짓기에는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아파트를 얻거나 더 멀
[스마트팜 그린몬스터즈 스토리] 네 명의 괴물 청년이 뭉쳤다. ‘그린몬스터즈’ 기계·전자분야의 LG연구원 출신 서원상 대표, KOPIA 해외 농업연구원 출신 전요한 공동대표, 토목 건축분야의 양요한,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품 디자이너인 윤소현. 이렇게 농업 배경이 전혀 없는 20~30대 청년 네 명이 뭉쳤습니다. 노지에 농사를 짓는 일반 농업이라면 기존 농업인이나 영농후계자들과 비교했을 때에 특별히 뛰어나기 힘들겠지만 대신 신사업으로 떠오르고 있는 스마트팜은 공학적인 것들이 밀집되어 있는 시설이니 공학 분야 연구원 출신인 우리들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농업은 일한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지요. 우리 네 명 중 디자이너인 윤소현님을 제외한 세 명은 모두 스마트팜 청년창업 보육센터 교육생 1기를 수료한 동기들입니다. 그 중 서원상 대표와 전요한 대표는 1년 반 정도 정기교육과정에서 함께 현장과 경영실습을 했을 뿐 아니라, 교육이 끝난 후 다른 스마트팜 농가에서 같이 일을 하며 호흡을 맞췄지요. 나만의 스마트팜을 짓겠다는 꿈이 있었던 서원상 대표는 스마트팜은 절대 혼자 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2021년 4명의 창업멤
[친환경 목장 농도팜 스토리] 자연이 함께 어우러진 가장 아름다운 목장으로 선정된 친환경 목장 ‘농 도 원’ ‘농 도 원’의 역사 농 도 원은 원래 ‘복음농도원’이라는 이름으로 1952년 6.25 전쟁 중에 설립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농장 중 하나입니다. 한때 농장내의 ‘복음농도원’이라는 농업학교를 통해 수많은 농촌지도자와 ‘가나안농군학교’를 탄생시킨 한국 농촌운동의 산실이기도 하죠. 농도원 출신인 ‘유태영’ 박사는 1960년대 새마을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세우고, 그 당시 우리나라가 너무 헐벗고 가난했기에 식량의 자주권을 우리 스스로 가져야겠다는 뜻을 정하고, 시골의 젊은 영농후계자를 육성하려 하셨죠. 한편 저희 아버님은 농장이 경제성장력 있는 산업화된 시설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농도원은 1973년부터 홀스타인 젖소를 기르고 우유를 생산하는 정통 낙농목장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제가 1990년 물려받아 ‘농도원’으로 이어가고 있지요. 화이트 칼라에서 목장 주인으로 처음 아버님께서 “이 일을 해봐라” 했을 때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어요. 서울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회사에 다니며 삽질 한 번 떠보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아버님은 동물과 자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