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응’의 새로운 인생 후반전 “75세까지, 태국 싸하쌋 학교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어요.” 선생님이 되고 싶었으나… 학교 다닐 때 내성적이라 궁금한 게 있어도 선생님들에게 잘 물어보지도 못한 채 소원하게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과 잘 지내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어요. 그 친구들은 선생님과 자주 만나 이야기하며 선생님이 조언해 주는 방향으로 진로를 정했는데, 저는 그러지 못 했던 거죠. 그래서 중·고등학교 시절 제 꿈은 선생님이 되어 저와 같은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필요한 것을 찾아 주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할 때 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홀로 2남 1녀를 키워야하는 상황에서, 장남인 저는 선생님이 되는 것보다 대학졸업 후 빨리 취직하는 것이 더 급했습니다. 포스코 대리점 ‘문배철강’에 첫 취직 그 당시 포항에는 포스코의 대리점격인 한일철강, 동성철강, 문배철강 등이 있었습니다. 포스코에 철판을 주문해 전산망을 통해 판매하는 회사였죠. 취직후 1년 정도를 다녔는데 직장분위기가 너무 거칠고 술, 담배 문화에 도저히 참기 힘들어 저 스스로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소개받은 직장이 바로 ‘공증인가운현합동법률사무소’로, 지금은
자연, 인간, 건축을 생각하다. 소리를 짓는 이형호 건축가 한국의 마당문화, Open Stage K, ‘사운드포커싱홀’ 그동안 우리나라의 공연장은 정동극장에서 출발해 서양극장 형태의 실내위주로 발전해왔습니다.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지자체 예술회관 등이 그 예들이죠. 실제적인 관객과 예술가의 접점이 일어나야 할 공연장이 이렇게 실내에 있다 보니 특권층, 매니아층, 예술가의 가족 등으로 관객이 한정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원래 우리나라의 공연은 야외에서 주로 이뤄지는 마당문화였죠. 마당에서 판소리, 창, 퍼포먼스 등 모든 것이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졌습니다. 유럽에서도 원형광장, 극장들이 야외에 있어 자연스럽게 일상의 삶속에서 공연들이 펼쳐지므로 어린 시절부터 버스커나 예술가들과의 접합이 이루어지게 되었죠. 지금 우리나라는 유독 이 부분이 사각지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간을 통한 소리 건축’이라는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사운드포커싱홀’입니다. 무대가 야외를 중심으로 오픈 되어 예술가들, 일반 사람들, 관객들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밀물과 썰물처럼 서로 교류가 일어나고 새로운 문화형태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버전의 야외 공연장,
군대에서 ‘기술사’와 22개의 자격증을 딴 군대 공신 안장원 교관 군에서 일할 생각 1도 없었던 나! 군에 발을 들여놓다 제 고향은 광주 인근의 시골마을입니다. 민주화운동, 학생데모 등을 보고 자랐던 저이기에 군에서 일할 생각은 1도 없었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2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공장, 공사현장 등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1998년 IMF 시절 입대 영장이 나와 고민하던 저에게 옷 장사를 하며 알게 된 사장님이 직업군인인 부사관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사장님은 힘들더라도 군에서 알뜰히 저축하면 전역 후,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큰 밑천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셨습니다. 그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저는 병무청을 찾아가 바로 지원서를 냈고, 그렇게 저의 군 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나를 발견하다 해병대에 입대하고 동료들과 똑같이 머리를 밀고, 옷도 군복으로 입고, 다들 제로선상에 서서 시작하는 그 시점에 깨달은 게 있었습니다. 제가 머리가 똑똑한 것도 아니고, 운동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가정형편이 나은 것은 더더욱 아니고, 좋은 친구,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닌, 너무 평범하다 못해 더 낮은 나인데 스스로
나는야! 서예 영업사원 캘리그라퍼 ‘김도임’ 작가 어린 시절 유독 잡생각이 많았던 아이 저는 어렸을 때 너무 생각이 많아 괴로울 정도였습니다. 아마 지금이라면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했을 것 같지만 당시에는 그런 의식이 별로 없었죠. 그냥 ‘나는 이런 애인가 보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엄마말로는 제가 어렸을 때 그림을 곧잘 그렸다고 해요. 바로 위의 언니는 그림을 그릴 때 선을 찔끔 찔금 그렸던 반면, 저는 과감하게 그렸다고 하더라고요. 원래 엄마도 미술학과를 가려고 했는데 외할아버지의 반대로 의상디자인을 전공하셨어요. 엄마는 잡생각이 많은 저에게 도움이 되도록 피아노, 그림, 서예 등을 하게 하셨죠. 10살, 서예에 완전 빠지다 10살 때 즈음 서예학원을 처음 갔는데 이때 완전 서예에 빠져버렸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은 저였지만, 서예를 할 때는 잡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다른 생각을 하는 순간 화선지에 먹이 번지고 글씨가 잘 써지지 않으니까요. 완전 글쓰기에만 집중을 해야 했는데, 그래서 더 빠져들게 된 것 같기도 해요. 피아노 학원도 같은 건물에 있었지만, 피아노는 30분 정도 뚱땅거리고 도망치듯 서예학원으로 달려갔어요.
비보잉에서 무용가로, 진정한 ‘춤추는 사람’을 꿈꾸는 차종현 안무가를 만나다 춤으로 대학을 갈수 있다고? 대한 진학을 앞두고 전공으로 사회체육학과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때 친구들과 어울리며 취미로 시작했던 비보잉을 더 잘하고 싶어 재즈학원을 다녔는데, 그곳에서 무용으로 대학을 갈수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죠. 어떤 대학을 가야하는지 알 수 없어 인터넷을 검색하며 알아보니 각 대학마다 현대무용, 고전무용, 발레 등 다양한 춤을 배울 수 있는 무용학과가 있더군요. 당시에 체육보다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춤에 더 집중할 생각으로 고3 여름, 스스로 진로를 결정했습니다. “다짐한 만큼 이뤄내 봐라!” 사실 예체능을 하려면 어느 정도 집에서 지원이 가능해야 하는데, 집 형편은 넉넉하지 않아 부모님에게 기대기는 죄송한 상황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리라 마음먹고 부모님께 저의 진로를 말씀드렸습니다. 부모님은 하고 싶은 일은 부모를 설득해서라도 하고 마는 저를 아셨기에 “네가 다짐한 만큼 이뤄내 봐라” 하시며 흔쾌히 허락해주셨어요. 그리고 최선을 다해 제가 무용을 하도록 응원해 주셨죠. 제가 밤을 새며 차가 다니지 않는 늦은 시
13번 공정으로 꽃 피운 얼음 꽃, 빙사과(氷沙菓) 장인 ‘홍성란’을 만나다 제2의 고향, 강원도 영월 저희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안성에서 정미소와 방앗간을 했습니다. 아버님은 집안의 장남으로 인물이 훤하시고 마음도 좋아 사람들이 잘 따랐어요. 그러다보니 유혹도 많아, 그 많던 재산을 다 탕진하고 결국 강원도 영월로 가셔야 했죠. 영월엔 작은아버지와 고모가 사셨는데, 아버지는 거기서 다시 방앗간을 시작하셨습니다. 제 기억에 의외로 음식솜씨가 좋으셨던 아버지와 음식솜씨가 남달랐던 고모 덕에 그곳에선 항상 먹을 것이 풍부했어요. 강원도 영월은 저에게 제2의 고향이랍니다. 우리 고모는 동네 ‘과방장’ ‘과방’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한마디로 ‘과자방’이죠. 음식 솜씨가 좋으셨던 고모는 특히, 정교한 음식을 잘 만드셨어요. 예전에 동네에서 잔치를 하면 한달 전부터 준비를 위해 광이나 방을 정해 ‘과방’을 차립니다. 항상 고모가 ‘과방장’이 되셨죠. 차려진 과방에는 아무나 못 들어가는데 저는 어리기도 했지만 그냥 통과 했어요. 이곳에서 여러 음식도 많이 보고, 약과와 과즐(과줄의 옛말로 순 우리말, 꿀과 기름을 섞은 밀가루 반죽을 판에 박아 모양을 낸 후 기름에 지진
《코리안 지오푸드》를 아시나요? 우리나라는 식품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인증 제도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친환경농산물인증, 유기가공식품인증이 있으며 그 밖에도 가공식품산업표준KS인증, 전통식품품질인증 등이 있지요. 이 중 지리적표시제(Geographical Indication System)는 제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인증제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지리적표시제의 정체는 뭘까요. 한 마디로‘특정 지역의 지리적인 특성에 의해 생산된 농수축산물 또는 가공품을 특정 상표처럼 인정하여 그 명칭을 보호해주는 제도’를 말합니다. 1940년대 프랑스가 처음으로 자국의 와인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제창한 제도로서, 지리적표시보호제(Protected Geographical Indication)와 원산지명칭보호제(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로 구분 운영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1999년 위의 두 제도를 본떠 ‘대한민국 지리적표시제’(KPGI, Korean Protected Geographical Indication) 법규를 처음 마련하였는데, 주된 이유는 대표 특산품인 ‘고려인삼’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made in China’
5월, 내면의 어린 나에게 선사하는 어린이날 선물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대형마트, 백화점의 장난감 판매대가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인다. 엄마 아빠 손을 붙잡고 온 아이들, 손자, 손녀를 데리고 나오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이모, 삼촌, 고모까지 온 가족이 아이 한 명을 위해 이 하루를 보낸다. 놀이 공원은 이날이 대목이라 각종 행사를 열어 어른들의 지갑을 열게 한다. 놀이 기구 하나 타기 위해 엄청난 줄을 기다려야 하지만 이날만큼은 아이를 위해 수고스러움을 감수한다. 식당마다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 메뉴를 홍보한다.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식당들은 이른 시간부터 입장하기 쉽지 않다. 입맛 까다로운 할아버지도 손자 손녀의 입맛에 맞춘 음식을 드신다. 흔히 볼 수 있는 어린이가 왕이 되는 이 날의 풍경이다. 아이들에게 어린이날은 갖고 싶은 선물을 받고 맛있는 거 실컷 먹고, 온종일 놀아도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는 날이다. 옛날과 달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아이들에겐 선물보다 학원가지 않고 자유로이 놀 수 있는 이날이 손꼽아 기다려질 것이다. 불과 한 두 해 전까지 만해도 나 역시 어린이날마다 몸과 마음을 바쳐 아이들에게 봉사했다. 하지만 청소년
딸기로 세상을 구하라! 특명을 띠고 세상에 태어났다 이 세상의 딸기덕후 모여라 딸기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한 ‘딸기백작’ 김강수, 맛은 똑같은데 못났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지는 딸기를 재탄생 시키려는 ‘버려진딸기’ 김호백, 전국에 있는 모든 딸기를 바구니에 쓸어 담기로 작정한 ‘딸기통’ 김진성. 이렇게 매년 딸기시즌만을 기다리던 딸기덕후 세 사람이 뭉쳤습니다. 미국, 독일, 벨기에 등 어느 나라의 딸기를 먹어봐도 우리나라 딸기만큼 맛있는 딸기는 없더군요. 예전에는 동남아에 수출되는 아세안 국가 생딸기의 대부분이 일본산이었는데 현재는 90% 이상을 한국 딸기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K컬처가 들어가면서 K딸기의 인기가 높아진 것도 있지만 점점 더 우리나라 딸기가 인정을 받고 있답니다. 이렇게 ‘한국 딸기가 세계에서 제일 맛있다고 자부해도 될 이 시점에 필요한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문화’라는 답을 얻었습니다. 딸기 공동선별장에서 특·상·중 등 육안식별로 좋은 등급을 받기에만 치중되어 있는 딸기가 전부가 아니라, 모양보다는 속이 더 맛있고 귀한 딸기가 제대로 소비자들에게 대우받는, 그리고 못난이라 하더라도 어떻게든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그
[세계속의 한국인] 나만의 대만 살이! (1) 타이완, 타이페이, 타이랜드 뭐가 다르지? 아무리 글로벌한 시대라고 해도 타국에서 자리 잡고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게다 온 가족을 이루면서 말이죠. 무엇보다 2세대들의 정체성과 교육 문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 순애보로 시작해 대만에 코를 꿰어 22년 동안 살며 새로운 것을 접하는데 두려움을 없애고 매번 인생은 무한도전이라 생각하고 대만에 정착한 분이 있습니다.‘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독자들을 위해 현재도 진행형인 대만살이의 희노애락을 3회에 걸쳐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너 그것 한 번 신청해봐!” 25년 전, 대학4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교내 게시판 글에 눈이 확 뜨였습니다. 곧장 같은 기계과 동기 ‘수기신’와 함께 학과사무실을 방문했죠. 마침 조교선생님과 행정사무원들이 있더군요. 조교선생님에 “학과사무실에 붙은 내용이 뭐에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응, 너 그것 한 번 신청해봐!”라고 한마디를 던졌는데 순간 저는 잠시 짧은 시간이지만 엄청 깊고 뭔가 저를 응원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평소 영어에 자신이 없었던 저는 졸업을 앞두고 영어 학점도 이수할 겸 신청해야겠다고 바로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