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령 물속에 빠진다 해도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 _ 존 버닝햄 성악을 전공한다는 아이의 말에 귀가 번쩍했습니다. 노랗게 부분 염색을 하고, 목이 늘어난 검은 티에 체육복만 입고 다니면서, 심드렁하게 탭으로 게임을 하던 아이에게 의외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오래도록 상담을 했습니다. 성가대에서 만난 교수님의 지도로 성악의 길로 들어섰지만, 교회 쪽으로만 가라는 압력에 고민이 많다고 했습니다. 신앙심이 부족한 자신이 대학 입학만을 위해 신학대로 가야하는지에 대해서요. 우리는 존 버닝햄의《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를 함께 읽었습니다. 수더분하게 생긴 아저씨의 모습이 부담 없다고 말합니다. 저도 이중섭의 ‘은지화’를 검색해서 보여주며 그 표정과 닮았다고 말해줬습니다. 조화로운 이 세계를 끌고 가는 지혜로운 어른처럼 보인다고 했지요. 아저씨 배 안에 있는 동물들은 실제 크기와 상관없이 비슷비슷한 크기입니다. 배를 타고 싶어 하는 꼬마들, 토끼, 고양이, 개, 돼지, 양, 닭, 송아지, 염소가 그렇습니다. 배는 아저씨의 마음 그릇이라고 말 했던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니, 자기 생각에는 배의 세계는 꿈의 세계이고, 색채가 있는 세계는 꼬마와 동물들의 개성을 강조하는
국제통화 한 통화로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자원봉사자 되다 2021년 6월 29일 새벽 2시가 될 무렵, 새벽에 국제전화 한 통이 걸려왔죠. 얼떨결에 받은 스마트폰 너머에 낯이 익은 지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몇 달 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는가?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신문 있잖나. 그간 봉사했던 분이 사정이 생겨 더 이상 못하시는데, 어떤가? 한 달에 한 번 경기도 ‘광명’ 지역 도서관에 비치하는 일을 해 줄 수 있는지 편집장님이 물어보시네” 전화 목소리에는 다급함과 간절함이 묻어있었고, 뭐든 신중하게 결정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곰곰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대답하게 되었죠. “네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바로 답변이 끝나자마자 “응 조만간 연락이 올 테니까, 기다리다 전화 오면 잘해 보시게!” 단 몇 분 만에 나는 국제통화로 자원봉사자가 되었고, 그날은 정신없이 곧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봉사할 일을 지구 반대편에 있는 곳에서 국제적으로 부탁을 받다 보니, 전화를 기다리는 심정이 마치 면접을 보는 신입사원처럼 은근히 긴장이 되고, 언제 전화가 오나 하며 스마트폰을 평소보다 자주 보게 되더군요. 마침 인사동에서 기다리던
[새로운 도전 이야기] 전기기타에서 전기자전거로 일렉(트릭)기타를 전공한 저는 ‘콘트라베이스’로 잘 알려진 밴드에서 10년 정도 공연을 다녔습니다. 연주하는 즐거움에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요. 하지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소위 ‘음악매니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정말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에서 내노라하는 연주자가 될 것도 아닌데 왜 음악을 하냐”는 등, 먼저 판단해 버리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신은 전문음악인보다 모든 음악분야를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곤혹스러웠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은 이 밴드와 함께 활동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좋지 않은 경험들이었죠. 결국 저는 10년이나 해왔던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연주를 그만두자 이번에는 음악하는 후배들이 저에게 음악을 가르쳐 달라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후배들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용기를 얻어 ‘실용음악학원’을 시작했지요. 그러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여러 가지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 학생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 곡 안 쓸 거예요, 그리고 칙칙한 발라드 곡을 왜 연주해요?” 가르치는 저의 입장에서는 기
왼손으로 바라보는 세상이야기 예쁜 글씨 쓰고 싶어서!! 이다 나는 악필이다. 어릴 적부터 학창시절 내내 아니 성인이 되어서까지 악필 콤플렉스는 늘 나를 따라다녔다. 어째서 내가 악필이 되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고 잘 모르겠다. 다만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에게 글씨 못 쓴다는 핀잔과 꾸지람을 끊임없이 들어왔을 뿐이다. 나도 나름대로 애써왔다. 큰마음을 먹고 예쁜 글씨로 교정하는 책을 신청해서 다달이 받아보았다. 하지만 처음 글을 배우고 깨우치는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도 아니고, 혼자서 그 지루한 정자체 글씨를 수없이 반복하며 따라 쓴다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결과는 몇 번 쓰다 말고 마치 다달이 쌓여가는 문제집 같은 책들에 엄마에게 돈만 버렸다는 꾸지람만 수년간 듣게 되었다. 혹 조금이라도 도움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서예 교실도 다녔다. 하지만 어찌어찌하여 한글이 아닌 한문반으로 등록하게 되었고 장시간 꾸준한 반복연습이 필요한 지루한 일에 별 성과도 얻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첫인상은 꽤 중요하다. 첫인상이 반드시 사람들과의 지속적인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지만 첫인상이 좋으면 한 번 만날 일이 두 번 되고
마흔이 되어서야 겨우 깨달은 행복 나는 별똥별이다. 요즘 내가 쓰는 별칭이다. 작년 말에 어린왕자를 여러 차례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는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졌다! 갑자기 떨어진 별과 같다’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왕자 이야기를 읽어서였을까 참 엉뚱하지만 딱 나 같은 별똥별이 떠올랐다. 1982년 아주 추운 겨울이다. 입춘이 막 지났으나 아직 봄기운이 느껴지지도 않는 날, 어두운 새벽 1시가 넘어서 큰 달이 뜨는 음력 정월대보름, 대한민국에서 가장 추운 강원도 고한에서 태어났다. 어느 책에선가 우주의 균형이 깨지면서 사람이 탄생한다고, 그래서 모든 사람은 절대 균형에 있지 않다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그 글귀를 읽으며 난 어떤 에너지 균형이 깨져 났단 말인가? 추운 겨울의 깜깜함과 크고 밝은 보름달이 대비되는 날을 닮은 나를 그려본다. 강원도 고한은 당시 탄광촌으로 조금 과장하자면 현재로서는 대기업과 같은 탄탄한 국영기업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강원도에서 살았다고 하면 농사짓고 구수한 사투리도 쓰며 얼굴도 햇볕에 그을린 그런 아이로 자랐을 것이라 상상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대다수가 깨끗한 직원 아파트에서 정시
의외의 장소와 공간이 주는 매력사람을 잇는 장소 도봉산 자락 아래에 위치한 방학중학교를 방문했다. 직사각형의 운동장에 본관 건물과 부속 건물이 ㄷ자 모양으로 세워진 형태다. 노란색의 건물 외경과 구령대의 위치는 예전에 많이 보아서 익숙한 전형적인 학교의 구조였다. 겨울방학 중이라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눈으로 뒤 덮인 운동장과 교사에서 짙은 향수가 풍겨 나왔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도봉구 마을학교 교사들에게 핸드폰으로 영상제작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도봉혁신교육지원센터의 연락이 아니었다면 굳이 학교 안으로 들어와 볼 엄두도 못 냈을 곳의 내밀한 공간으로 들어왔다. 강의를 하면서 내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이 위치한 공간에서의 수업이었고, 이웃 동네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와 공동체에 무언가 이바지할 수 있다는 반가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지금 사는 노원구와는 서로 맞대어 있고, 어린 시절엔 수유동에 살았으니 도봉구는 늘 고향 같은 느낌이다. 도봉구 수유동에서 강북구 수유동으로 행정이 나뉘는 시간에도 북한산과 도봉산은 서로 이어져 나의 걸음을 맞이해주던 쉼터와 같았다. ‘꿈빛터’라는 건물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학교와 마을을 잇는 공간인 이 건
나는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결혼 후부터 지금까지 15년 동안이나 이사 갈 때마다 싸매고 다녔던 대학교 전공책을 미련 없이 싹 다 버렸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언어들에 관심이 있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막상 언어를 전공으로 선택하니 잘해야 한다는 부담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커져 즐겁게 공부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시험에 대한 압박감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도 편히 자지 못하며 피 말리듯 했던 통번역 대학원 시험에 낙방을 하고서는 다시 공부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실망시켰다는 자책감과 다시는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강했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미련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혼과 출산으로 직장을 그만둔 저는 다시 빨리 일을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갓난아이를 시댁이나 친정 부모님께 맡길 수 없는 상황이라, 몇 년간 육아에만 전념해야 했습니다. 결혼 초반 남편은 직장에 잘 적응하지 못해 자주 옮겨 저희의 생활은 매우 불안정했어요. 게다가 밤늦게까지 일을 하니 아이를 키우는 것은 오로지 저의 몫이었죠. 새벽마다 깨어 우는 아이를 홀로 달랠 때는 한 번도
K-고3을 마치면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 작년 고등학교 3학년인 내가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되뇌인 말이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수험생의 시간이 끝났다.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을 돌이켜보면 정말 열심히 살았다. 학교에선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에는 교육청에 프로젝트 활동을 하러, 주말엔 다른 학교로 수업 들으러, 시험기간이 되면 ‘시험 못 보면 어떡하지? 성적 떨어지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에 휩싸이던 나의 지난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 정신없이 달려왔지만 돌이켜보면 꼭 힘든 것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힘든 시간 속에서 잠깐 잠깐의 행복이 나를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점심시간, 몰래 나가다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학교는 조용했다. 친구들은 대부분 가정학습을 신청한 터라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독서실에 돈 주고 가느니 학교에서 밥 얻어먹으며 공짜로 공부하겠다고 수능을 치르기 전까지 꿋꿋이 학교에 나왔다. 그 넓은 자습실에서 혼자 공부했다. 홀로 공부를 하고 있자면 문득 외로워지기도 했다. 급식을 먹으러 잠깐 나온 친구들과 만나 밥을 먹고 학교 안을 산책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수능을 약 한 달 앞둔 어느 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아~ 법정 스님의 책이 여기 있었구나!’ 책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다시 집어 든 책 속에서 쪽지 하나가 떨어진다.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17년 전 병실에서 만난 환자의 보호자 연락처다. 한 달 동안 2인실에서 지내며 속 얘기를 하던 일이 생각나 전화를 하려다가 ‘아차’싶어 다시 종이를 접었다. 혈액암을 앓고 있는 40대 동사무소 여직원은 그때 골수이식을 앞두고 있었다. 국내에는 적합한 골수가 없어서 해외에서 기증자를 찾았지만 말이 기증이지 4천만 원의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분당 아파트를 처분해서 병원비를 마련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날마다 환자의 언니가 와서 밤새며 간호를 했다. 그러면 난 왜 그 병실까지 갔는가? 인도에 다녀오고 급성간염으로 응급실로 향했다. ‘리시께시’에서 20루피를 주고 바나나와 오렌지를 샀다가 원숭이에게 습격을 받아, 약을 한 주먹씩 먹어서라고 혼자서 추정해 본다. 종이봉투에 과일을 담으라는 로운리 플레넷의 깨알 같은 조언을 깜빡 잊었다. 비닐봉지에 과일을 담아 덜렁덜렁 걷고 있을 때 원숭이 떼를 만났다. 그중 몸집이 좀 있어 보이는 원숭이가 과일 봉지를 낚아챘다. 봉지는 힘없이 뜯겨나가고 오렌지가 굴
[주수연의 인생 단상 19] 손에 넣고 싶다면, 눈에 보이게 하라 ‘벌써 한 해가 다 갔는데, 왜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지?’ 매일 새로운 사건, 사고가 터지는 일상에서 늘 해야 할 업무가 등 뒤에서 나를 밀고 있다고 느꼈던 예전에는 매 연말이 다가올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매 순간 일을 하고 있었음에도 늘 아무것도 이루어낸 게 없다고 느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죠. 특히 이 시기는 회사에서 각 개인의 성과를 평가하는 시기라 매우 중요한데, 연초의 기억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벌써 2021년도 이제 거의 다 흘러갔습니다. 여러 강의를 하면서 직장인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주제는 역시 ‘시간관리’였던 것 같습니다.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단연코 ‘시간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였습니다. 이루고 싶은 꿈과 목표는 많은데, 항상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지고 바쁘게 일상에 쫓기듯 살아내는 우리의 고민은 거의 비슷한가 봅니다. 과연 우리는 시간을 관리할 수 있을까요? 24시간이라는 시간은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이러한 시간은 가만히 두어도 흘러가고, 붙잡으려 해도 붙잡을 수 없지요. 매일 리셋되는 시간을 소중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