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미정의 문화·예술 뒷이야기 4] 내 옆에 있는 예술 지난 대통령 선거는 숨 막히는 접전을 거듭한 끝에 97%의 개표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20대 대통령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만큼 박빙이었다. 직접 선거로 가리는 대통령 선거는 각 사람마다 왜 그를 지지하는지 각양각색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공공기관이라면 그리고 정부의 영향을 많이 받는 기관이라면 앞으로 5년 동안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가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다. 더구나 투표하기 전에 각 후보들의 공약을 살펴보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가슴에 와 닿는 공약을 찾기는 어려웠다. 문화예술 분야의 실질적인 공약이 없는 이유는 경제, 국방, 교육 등 보편적인 생활에 밀접한 분야와는 거리가 멀어서 후순위로 밀리는 분야가 문화예술계인 이유도 있고, 정치와 법에 주도권을 가진 분들이 예술에는 문외한이라 생각하셔서 주변 문화예술인들의 생각을 모아 정책을 구성하다보니 주요 분야에서 일하는 분들의 생각과 그 외 주변부 예술인들의 생각이 다르고 그렇게 급조한 공약이라 두루두루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각 후보들 간의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공약도 특별한 차별점을 찾기는 어려
일, 쉼, 놀이는 건강한 우리의 삶을 위한 삼위일체 ‘생활여가연구소’ 옥성삼 소장 “사람들이 일하고, 쉬고, 놀이하는 것은 각각 독립되어 있는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은 어느 한가지만으로 이뤄지거나, 한 가지가 없어도 지속 가능하게 계속 유지 될 수 없어요. 일, 쉼, 놀이는 우리의 실제 삶을 이루는 기본요소로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합니다. ” 중2,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지다 돌이켜보면, 제겐 중2때 세상을 바라보는 뼈대가 거의 만들어진 것 같아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인생을 도덕적으로만 살아야하나? 하나님은 세상을 왜 만드셨지? 무엇을 하며 사는 게 재밌고 바람직할까?… 삶의 근본적인 고민들을 이때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중3때 뇌종양으로 쓰러져 7년을 누워계시다 소천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 “이럴 수가 있느냐”며 막 따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고민들이 제가 신학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하여튼 그렇게 신학교를 갔지만, 그곳에서의 저의 모습은 한마디로 자유로운 영혼이었죠. 3년 정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제가 목사가 될 확실한 증표를 달라했습니다. 묵묵부답 이시길래 ‘아~ 이 길이 아니구나’하며 포기했어요.(웃음)
칠레, 모든 것이 느리고 우아하게 아내에게 칠레사람들의 재미난 성격을 경험한 대로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즉각 없다고 했다. 없다고 했으면 되었지 다 아는 척하면서 글 쓰지 말라고 눈까지 치켜뜨는 건 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 이 세상에 전문가가 있어야 하는지를. 사회학자나 문화연구가들이 인간의 행동문화를 연구해 놓은 자료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물론, 살면서 부딪히며 타국의 생활문화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체득하게 된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타국의 생활문화를 다 알게 될까? 살아보니 평생을 살아도 알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사회학자의 눈으로 살게 되지 않고 교민의 눈으로 살 수 밖에 없어서 그렇다는 얘기다. 아무래도 교민으로서 가게 생활 위주로 접한 칠레인들의 성격 정도로 국한시켜 소개할까 한다. 칠레인들의 발음 23년 전, 칠레에 도착하고서 말하는데 도움이 되자고 TV를 많이 보았다. 격음이 하나도 없고 동글동글하니 아동틱하게 느껴졌다. 오랜 관습 탓인지 칠레사람들은 격음을 발음하지 못한다. 대신 된 발음을 한다. 그러니까 ㅅ,ㅋ,ㅌ,ㅍ,ㅎ의 발음이 안되어 ㅆ,ㄲ,ㄸ,ㅃ 으로 발음하며 ㅎ의 발음은 아예 없다. 경기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이 그리운 세상 유난히 고된 현장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매 주마다 있는 회사 전체 직원회의에 늦을 것 같아, 미리 양해를 구해 놓았지만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퇴근길 정체가 조금은 짜증스러운 저녁이었죠. 한참 삼거리 직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앞에 서 있던 승용차가 조금씩 후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 옆 차선을 타려고 준비하나 보다 하고 있는데, 이 차가 대체 멈출 기미가 없는 겁니다. 급하게 ‘빵~!’하고 크락션을 울렸지만, 조금의 지체함도 없이 ‘쿵~!’ 후진으로 제가 타고 있는 트럭의 정면을 그대로 박아 버렸습니다.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에, 온 힘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저는 잠시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사고를 낸 앞차의 운전자는 나올 기미도 없이 조용했으니, 혹시 내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있어 차가 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분명 나는 브레이크를 죽어라 밟고 있었고, 앞차의 잘못이 분명한데도 차 속에 여전히 앉아있는 운전자가 괘씸해 문을 열고 고함을 치며 나갔습니다. “도대체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신호는 바뀌어
엘 시스테마 군포 ‘춤추는 콘서트’ ‘음악으로 세상이 변할 수 있을까요?’ “엘 시스테마(El Sistema)가 무슨 뜻이죠?” 만나는 분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입니다. 저는 질문에 답하기 전에 이렇게 되묻습니다. “음악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왜냐하면 이 질문의 답이 ‘엘 시스테마’이기 때문이죠. 엘 시스테마는 베네수엘라의 국립음악교육재단을 일컫는 말입니다. 마약과 총기에 노출된 채로 범죄에 길들여진 달동네 빈민가의 청소년들이 ‘엘 시스테마’의 악기교육을 통해 음악에서 희망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손에는 총이나 마약 대신 악기가 들려져 있었고 하루 종일 악기 연주시간을 기다렸답니다. 악기연주는 즐거운 놀이와 같았죠. 오케스트라의 인원수는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들의 변화는 개인에서 가정, 사회로 점차 확대 되어갔습니다. 엘 시스테마는 남미의 베네수엘라를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었죠. 군포시 마을 만들기 사업에 선정 되다 음악을 통해 청소년들을 깨우고 변화시켜가고자 하는 엘 시스테마의 꿈을 갖게 된 것은 12년 전의 일이었어요. 그 시기에 유치원생과 초등저학년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게 되었고 5~6년 지속되다 중단되었습니다. 음악뿐
5박6일, 남해안 관통 공동체로 우주문화를 창조하는 문화, 역사기행을 하다 A. 여행준비 올해 대폭 길어진 추석기간은 자칫 잘못하면 여느 명절처럼 허망하게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섬세하게 시간과 일정을 배열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문화역사기행을 다음과 같이 조정해 약 1달간의 준비를 거쳐서 시행해 본 결과를 여기에 올립니다. 1) 시간 - 일정조정과 여행공동체 :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분들은 추석기간의 여행을 위해 일단 가족방문을 미리 하거나 혹은 추후에 하기로 하고 가족들의 양해를 미리 얻었습니다. 그리고 일정을 추석전 하루(9월8일 목요일) - 추석연휴 (9월9일~12일) - 추석후 하루(9월13일 화요일)인 총 5박6일로 정했습니다. 각자의 회사에 추석 전후 이틀간 휴가를 미리미리 신청함으로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에 참여하는 분들의 직업은 모두 달랐으며, 남녀 불문하였고, 초등학생에서 70세가 다 된 분들, 네팔 출신과 중국인까지 포함해 하나의 여행공동체가 되어 움직여 보았습니다. 여행의 별미는 어디에 가고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있지 않고 누구와 같이 가느냐에 있다고 하는데, 평소
[손미정의 문화·예술 뒷이야기 5] 클래식 최초의 불법복제 곡은? 휴일엔 밀린 전시를 몰아보기도 하지만 사놓고 미처 못 읽은 책을 읽거나 한가롭게 집에서 보고 싶었던 콘텐츠를 몰아보기도 한다. 며칠 전, 전 세계에서 넷플릭스 1위를 기록하며 인기몰이를 했었던 ‘지금 우리 학교는’을 보았다. 평소 좀비물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리즈가 왜 인기였는지 궁금해서 뒤늦게라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리즈 중간쯤에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생존자들이 좀비들을 음악실로 유인하려고 음악을 트는 장면이었는데 이때 나온 음악이 바로 오늘 소개해 드릴 곡이다. 대부분의 클래식 음악이 그렇듯이 종교음악에 기원이 있는 곡인데 기독교에서 예수가 고난을 받고 돌아가신 성 금요일에만 불리는 ‘미제레레 메이 데우스(Miserere mei, Deus)’라는 곡이다. 이 곡은 1638년 교황청 소속 작곡가 그레고리오 알레그리가 시편 51편에 곡을 붙인 것으로 그 뜻은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이다. 지금도 ‘미제레레’는 화려한 궁정 음악이나 정교회 음악과는 차별화된 곡으로 성가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9성에서 12성 합창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선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34]나를 되찾는 한 해가 되었으면 과거를 되돌아보면 과연 나대로 살아왔나 반성해 봅니다. 내가 기준이기보다는 남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에 기준을 두고 살아오지는 않았나 생각해 보지요.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면 나는 없어지고 주변에서 만들어 준 나가 진짜 나인 줄 알게 됩니다. 우리 역사에도 그런 일이 수차례 벌어졌습니다. 우리 역사가 기준이 아니라 중국 역사가 기준이었고 중국 기준에 맞을 때 가치가 있다고 여겼답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직접 나서서 중국 기준에 맞추려고 하였지요. 그럼 역사를 통해 한 번 살펴볼까요? 첫째, 고조선의 마지막 왕은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입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을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라 했어요. 위만은 준왕을 몰아낸 찬탈 군주라고 하여 위만조선을 정식 왕조로 인정하지 않았지요. 우리는 조선시대까지 위만조선의 역사 대신 중국 기자조선의 역사를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정통으로 인정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위만조선을 인정하고 있답니다. 둘째, 고구려 연개소문의 성씨는 연씨이고 이름은 개소문입니다. 그런데 당태종의 아버지 이연과 한자가 같다고 하여 연씨
흰색셔츠 검정바지 일본 출근복 후드티 청바지 한국 출근복 사이에 낀 나!! 일본 도쿄에서 4년 정도 근무하고 2022년 9월말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IT회사에 다시 출근한지 벌써 4개월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업무를 하면서 한국과 일본을 자주 비교하게 됩니다. 먼저 출근 할 때의 모습, 도쿄에서의 출근 지하철은 조용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백팩을 앞쪽으로 매면서까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 한국에서는 사람들을 밀치는 것은 물론, 가방으로 치기도 하니 당황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출근 첫 날, 저를 더 당황케 만들었던 것은 바로 제 자신의 출근 복장이었습니다. 전 일본인처럼 ‘검정바지에 흰색셔츠’를 입고 출근했습니다. 그나마 변화를 준다고 구두가 아닌 단화를 신고 갔는데 저만 우울한 사람처럼 입고 온 겁니다. 더구나 제 직업이 IT관련업무여서 더 그렇게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다른 직원들은 너무 편한 옷을 입고 있었죠. 후드티에 청바지 혹은 면티에 면바지는 마치 집에서 마실 나온 듯 자유로운 복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도 일본으로 가기 전 한국에서 직장을 다닐 때는 이렇게 입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 청바지입
우여곡절 4000km 유럽 출장기(3) 스위스가 유럽(EU)이 아니라고? 빌링앤 슈베닝엔은 두 도시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하나의 지역이었습니다. 숙소로 묵었던 곳은 옛 성채가 그대로 있어 옛 도시의 느낌이 살아있는 지역이었죠. 아무래도 이탈리아와 가까운 독일남부라 그런지 로마 카톨릭 성당이 시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골이 자동차 부품으로 유명한 동네라고 합니다. 업체명만 말하면 모두가 아는 그런 업체들의 지사가 있고요. 그래서 연간 몇 번씩 자동차 엔진 부품, 전장 부품 등에 관한 전시회가 열리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저희 독일 엔지니어가 자동차 분야 일도 겸하고 있다 보니 이런 시골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죠. 시내를 둘러볼 시간도 없이 바로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가기 위해 독일 엔지니어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거의 650km 정도를 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엔지니어의 사무실 쪽으로 달리다 보니, 이제껏 보지 못했던 산지로 들어가는데 마치 한국의 강원도를 달리는 듯한 느낌이어서 이질적이지 않았죠. 오늘은 며칠 동안 고생한 사장님과 저를 대신해 독일 엔지니어가 우선 베네치아까지 운전을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뒷좌석에서 편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