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니즘Russianism 연구 - 러시아 미술] 하나의 진리와 다양한 해석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vs. 조르주 루오의 [부상당한 광대] 한 민족의 특이성은 그들이 대상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대표적인 3대 표현방식(문학,음악,미술)을 통해 깊은 내면세계를 드러냅니다. 한국인들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좁아지는 지구에서의 삶을 제대로 영위하려면, 북쪽에 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러시아인들의 속마음을 알아야 하는데, 그 방법 중의 하나가 이들의 조상들이 남겼던 표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 자체로는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동일한 실체를 완전히 다른 민족들이 어떻게 보고 표현하는가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그동안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에서 ‘러시아음악’을 다루어왔지만, 이번에는 ‘러시아미술’을 다루고, 점차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문학’도 살피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는 러시아인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15세기의 위대한 이콘화가인 안드레이 루블료프(1360~1430)가 남긴 [삼위일체]를 다루고자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이콘을 프랑스가 존경하는 화가인 조르주 루오(1871~1958)가 같은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27] 무령왕릉 진묘수, “너를 천년동안 지켜줄게” 백제는 흔히 ‘잃어버린 왕국’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게 많아서인지, 잊은 게 많아서인지, 빼앗긴 게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700년 역사에서 남아있는 것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아마 일제강점기 상당 부분 도굴 또는 도굴에 가까운 발굴로 상처를 입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릉은 구사일생으로 도굴되지 않았습니다. 1971년 발굴됐으니 올해로 벌써 발굴 50주년이네요. 무령왕릉이 도굴되지 않은 건 일종의 행운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발굴(도굴)자의 착각 덕분이었지요. 가루베 지온(1897~1970)은 송산리 고분들을 발굴하면서 무령왕릉을 능이 아닌 언덕으로 생각했습니다. 1971년 여름 어느 날, 긴 장마에 대비하여 송산리 고분의 배수로를 만들던 중 땅을 파던 삽 끝에 무언가 걸렸습니다. 아래를 파보니 그곳에는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무령왕릉이 있었습니다. 무령왕릉 안에는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지석(땅속에 묻는 비석)을 비롯해 수없이 많은 유물이 들어있었습니다. 무령왕릉의 입구는 벽돌로 막혀있었는데, 벽돌을 허물자 안개인 듯, 수증기인 듯한 기운이 뿜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29]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조선시대 왕들 가운데 ‘군’이 들어간 세 왕이 있었다.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이다. 노산군은 숙종 때 단종으로 복권되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여전히 군으로 남아있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쫓겨났고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쫓겨났다. 반정(反正)은 ‘바르게 돌려놓다’는 뜻이다. 연산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있던 박원종은 신수근을 찾아갔다. 박원종은 신수근과 장기를 두는 데 장기 알의 ‘궁(宮)’을 서로 바꿔 놓았다. 신수근에게 반정에 참여해 달라는 표시였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다. 연산군의 부인 신씨는 신수근의 여동생이었다. 장차 연산군이 폐위되면 신씨도 폐비가 되고 신수근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반정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원종은 왜 반정과 같은 일급비밀을 연산군의 처남이자 신씨의 오빠인 신수근에게 알려주고 같이 참여하자고 했을까. 실은 신수근은 박원종이 장차 왕으로 추대할 진성대군의 장인이기도 했다. 신수근의 딸 신씨는 반정이 성공하면 나중에 진성대군(중종)의 부인 곧 왕비가 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박원종은 왕의 장인이 될 신수근에게 반정을 알리고 자기편에 서달라고 한 것이다. 신수근
5박6일, 남해안 관통 공동체로 우주문화를 창조하는 문화, 역사기행을 하다 A. 여행준비 올해 대폭 길어진 추석기간은 자칫 잘못하면 여느 명절처럼 허망하게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섬세하게 시간과 일정을 배열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문화역사기행을 다음과 같이 조정해 약 1달간의 준비를 거쳐서 시행해 본 결과를 여기에 올립니다. 1) 시간 - 일정조정과 여행공동체 : <행복한 동네문화 만들기 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분들은 추석기간의 여행을 위해 일단 가족방문을 미리 하거나 혹은 추후에 하기로 하고 가족들의 양해를 미리 얻었습니다. 그리고 일정을 추석전 하루(9월8일 목요일) - 추석연휴 (9월9일~12일) - 추석후 하루(9월13일 화요일)인 총 5박6일로 정했습니다. 각자의 회사에 추석 전후 이틀간 휴가를 미리미리 신청함으로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에 참여하는 분들의 직업은 모두 달랐으며, 남녀 불문하였고, 초등학생에서 70세가 다 된 분들, 네팔 출신과 중국인까지 포함해 하나의 여행공동체가 되어 움직여 보았습니다. 여행의 별미는 어디에 가고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있지 않고 누구와 같이 가느냐에 있다고 하는데, 평소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36] 왜 일본은 우리를 무시하는가? 요즘 한일 관계가 뜨겁습니다. 위안부, 징용, 독도 등등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뜨겁긴 한데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양새입니다. 최근 일본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서술했습니다. 엄연히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인데 이웃나라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도 초등학교에 교과서에 실었으니 말입니다. 일본의 초등학생들이 커서 어른이 된다면 독도를 ‘무력’으로라도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웃나라가 우리 땅을 자기 땅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이웃나라를 철저히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왜일까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일까요. 역사를 한 번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5천 년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은 무엇일까요? 일본과의 싸움인 임진왜란이라고도 하고, 청나라에 굴복한 병자호란이라고도 하겠지만 압도적인 대답은 역시 일본에게 36년간 나라를 빼앗긴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5천 년 역사를 이어가다보면 이런저런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임진왜란처럼 방심하여 왕이 나라 끝 의주까지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34]나를 되찾는 한 해가 되었으면 과거를 되돌아보면 과연 나대로 살아왔나 반성해 봅니다. 내가 기준이기보다는 남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에 기준을 두고 살아오지는 않았나 생각해 보지요.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면 나는 없어지고 주변에서 만들어 준 나가 진짜 나인 줄 알게 됩니다. 우리 역사에도 그런 일이 수차례 벌어졌습니다. 우리 역사가 기준이 아니라 중국 역사가 기준이었고 중국 기준에 맞을 때 가치가 있다고 여겼답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직접 나서서 중국 기준에 맞추려고 하였지요. 그럼 역사를 통해 한 번 살펴볼까요? 첫째, 고조선의 마지막 왕은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입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을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라 했어요. 위만은 준왕을 몰아낸 찬탈 군주라고 하여 위만조선을 정식 왕조로 인정하지 않았지요. 우리는 조선시대까지 위만조선의 역사 대신 중국 기자조선의 역사를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정통으로 인정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위만조선을 인정하고 있답니다. 둘째, 고구려 연개소문의 성씨는 연씨이고 이름은 개소문입니다. 그런데 당태종의 아버지 이연과 한자가 같다고 하여 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