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행수필] ‘여수 밤바다 ’ 유감 이순신 놀이, 소녀상 놀이 올해 추석 여수 밤거리와 바다의 풍경에서 솟아오르는 환상적 보름달은 구름에 가렸다 나타났다 하며 우리를 애태우며 감질나게 했습니다. 아이들이 밤하늘 높이 쏘아 올리는 중국산 프로펠러 장난감은 두둥실 뜬 달이 있는 하늘과 우주를 향하고픈 마음을 상징이나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감동의 대미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이순신과 관계된 ‘이순신 광장’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이순신 동상’과 ‘승전한 대첩’ 이름들과 ‘거북선’, 그리고 둘째는 저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서 옆에 놓인 빈 의자에 같이 앉아보라고 초청하는 듯한 ‘소녀상’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놀랍게도 같은 대상인 왜군,왜놈,일본인이 우리를 끝장내려고 의도적으로 가한 행위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동일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선조는 400여 년 전의 ‘먼 과거’에는 방어에 성공했으나, 110~80여 년 전의 ‘가까운 과거’에서 실패했다는 명백한 차이점이 있기는 합니다. 여수시가 의도적으로 이런, 연관되지만 상반되는 과거들을 배열해서 생각하게 만든 점은 매우 좋았던 것 같습니다. 여러 점에서 아쉽고 안타까울 뿐 아니라, 좀 더
그 누구의 길도 아닌 갑자기 시간 부자가 되었다. 찌는 듯한 여름도, 칼날 같은 겨울도 아닌 봄, 가을을 포함한 일 년을! 연구년이란 이름으로. 머리 쓰는 일보다 몸 쓰는 일을 낮춰보는 풍토에서 몸 쓰는 일이 보다 더 나 자신과 가까워지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부터 교육과정 안으로 걷기를 끌어오고 싶었다.《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서명숙)에서 저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제주도 올레길을 만들었고, 그 후로 각 지차체에서 너도나도 길을 내게 된 과정, 그 가운데 내가 살고 있는 의정부의 소풍길도 있다는 것이 나를 산티아고로 거침없이 잡아당겼다. 산티아고를 가보자. 가기 전에 의정부를 샅샅이 걷자. 그런 뒤 학교에서 수업을 소풍처럼 설계하자. 시와 소설이 살아 움직이도록.《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박태원)을 읽고 도시를 직접 걸어보며 패러디해보기처럼. 나의 계획서는 교육청의 여러 관문을 통해 낙점이 되었고 모든 계획의 출발지인 산티아고로 향하게 했다. 연수원의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포르투칼에서 출발하는 여정을 선택했다. 폰테 데 리마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의도하지 않았는데 숱한 문학작품과 영화, 친구, 가족이 길에서 소환되었다. 첫 번째
우여곡절 4000km 유럽 출장기(2) 자꾸 의심하게 만드는 유럽의 네비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들어와 고속도로로 달리며 네이게이션을 세팅했습니다. 암스테르담 외곽에서도 30km의 거리가 나오더라고요. 이쯤 되니 또 네비게이션이 의심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전시장은 암스테르담시 외곽으로 알고 있는데 시내 중심가로 안내를 하고 있었죠. 아니나 다를까 역시… 도착한 곳은 큰 교회 건물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엑스포를 하는 것일까요? 이곳이 전시장일리는 만무하고, 다시 시 외곽의 임의의 주소를 찾아 차를 몰고 달렸습니다. 그랬더니 스키폴 공항 서쪽에 위치한 큰 벌판 한 가운데 덩그러니 온실 같은 곳이 나타났습니다. 다시 여기가 전시장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죠. 보통 코엑스나 킨텍스 같은 컨벤션 센터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는데 이곳은 그런 곳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나 동아시아 3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에 전시장이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아무튼 전시장으로 진입, 짐을 대략 풀었습니다. 저녁 8시가 넘어가니 빨리 나가라고 재촉을 하더군요. 그래서 세팅은 내일 하기로 하고 일단 철수를 했습니다. 세계를 주름잡았던 네덜란드 늦은 저녁이라 제대로 식사도 못하고
르완다 아카게라의 밤하늘은하수와 별자리에 홀리듯 빠져든 날 선선한 초저녁 바람이 불어오자 삼삼오오 모닥불 앞으로 모여들었다. 진홍색 노을이 서편의 하늘가를 물들이니 빨간 불꽃색이 더욱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아카게라의 캠핑장은 전기펜스를 둘러 야생동물의 접근을 막는 공원 내의 안전지대다. 범상치 않은 동물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풀벌레 소리가 점점 선명해지면 사방은 온통 고요와 적막으로 뒤덮인다. 이 무렵이면 유럽 사람들은 대체로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눈다. 캠핑장에 놓인 의자에 모여들지만 대부분은 준비해 온 개인용 간이 의자를 펼쳐서 대형을 만든다. 저녁은 샐러드와 샌드위치로 간소해서 담소에 집중하느라 먹는 것은 그다지 중요치 않은 느낌을 준다. 반면, 우리 한국팀은 캠핑장의 한구석에 위치한 불판 주변으로 모였다. 이번에도 장작불 위에 삼겹살을 구워 낼 계획이다. 지난번 우기철에는 물을 머금은 나무에 불을 붙여서 밥을 지어먹는 게 쉽지 않았는데, 건기의 장작은 화력이 무섭게 타오른다. 나무의 은근한 향기에 어우러져 지글지글 노릇노릇 기름기가 쏙 빠지게 익어가는 목살을 여럿이 함께 먹으니 입에서 살살 녹는 형언키 어려운 황홀함이다. 기온이 내려
우여곡절 4000km 유럽 출장기(3) 스위스가 유럽(EU)이 아니라고? 빌링앤 슈베닝엔은 두 도시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하나의 지역이었습니다. 숙소로 묵었던 곳은 옛 성채가 그대로 있어 옛 도시의 느낌이 살아있는 지역이었죠. 아무래도 이탈리아와 가까운 독일남부라 그런지 로마 카톨릭 성당이 시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골이 자동차 부품으로 유명한 동네라고 합니다. 업체명만 말하면 모두가 아는 그런 업체들의 지사가 있고요. 그래서 연간 몇 번씩 자동차 엔진 부품, 전장 부품 등에 관한 전시회가 열리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저희 독일 엔지니어가 자동차 분야 일도 겸하고 있다 보니 이런 시골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죠. 시내를 둘러볼 시간도 없이 바로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가기 위해 독일 엔지니어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거의 650km 정도를 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엔지니어의 사무실 쪽으로 달리다 보니, 이제껏 보지 못했던 산지로 들어가는데 마치 한국의 강원도를 달리는 듯한 느낌이어서 이질적이지 않았죠. 오늘은 며칠 동안 고생한 사장님과 저를 대신해 독일 엔지니어가 우선 베네치아까지 운전을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뒷좌석에서 편안하게
붕~붕~붕~ 우여곡절 4000km 유럽 출장기(1) 헉;;; 3500km 자동차 출장이라고? 여러분은 3500km의 거리가 얼마정도인지 가늠이 되실까요? 산술적으로 계산해 인천공항에서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하와이까지 7500km입니다. 3500km는 하와이까지 가는 절반거리인 것이죠. 한국 사람의 머릿속에 제일 긴 거리는 서울 부산의 400km 입니다. 그 외에 가장 긴 거리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죠. 서울 부산을 왕복해봐야 800km정도인데 이걸 4.5번 왕복하는 거리입니다. 저도 한국 사람인지라 3500km를 생각할 때 저의 지평이 넓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한반도가 얼마나 작은 곳인지, 게다가 허리가 잘린 남한만의 공간, 그 속에 갇혀(?) 살고 있었던 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이번 유럽출장은 자동차를 직접 운전해 독일 한 가운데의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쳐 독일 남부도시와 이탈리아 베네치아까지 여정으로 3500km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우여곡절로 4000km 이상 차를 타고 달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허리가 좋지 않고 왼쪽 어깨도 부상을 입어 운전을 잘 할 수 있을까 염려되었지만 막상 운전을 하고 가야할 수밖에 없는
"휴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고등학교 시절, 방학이 다가오는 어느 여름날 엄마에게 여름휴가에 대해 물었다. 엄마는 휴가라는 단어가 애초에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래서 더 자세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재차 물었다. 괜히 물어보았다. 휴가 같은 소리 한다는 핀잔만 들었다. 같은 반 친구 주연이가 강릉으로 여름휴가를 간다면서 나에게 “경혜, 너는 어디 가?” 라고 물은 것이 화근이었다. “글쎄…” 라며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과연 우리가 여름휴가라는 걸 간 적이 있었던가? 생각하게 되었다. 고등학생 나이로 약간의 눈치는 있었던지라 천진난만하게 계속 묻지는 못했다. 그래서 차근차근 말했던 건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나니 약간 서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더 조르지는 못했다. 놀러 갈 형편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그때 아빠는 농부이면서 목수였다. 농부가 쉴 때는 목수로 일했고, 목수 일이 없을 때는 농사를 지었다. 시간의 빈틈없이 사는 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농부의 아내이자 목수의 아내였으니 바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니 애들 데리고 놀러 갈 틈이 있을 리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