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해치 2023년 광화문 앞 월대가 새로 놓이면서 광화문 앞 동물도 2마리에서 6마리로 늘어났습니다. 2마리는 예전부터 광화문 앞을 지키고 있던 늠름한 두 마리의 ‘해치’입니다. 해치는 ‘해태’라고도 하는데 상상 속의 동물로 선악을 구분하는 동물입니다. 머리에 난 뿔로 악한 자를 들이받거나 사나운 이빨로 악한 자를 물어뜯는다고 합니다. 특히 광화문의 해치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아내는 특별한 임무도 부여받았습니다. 광화문 앞 월대는 세종이 반대한 이후 설치되지 않았다가, 흥선대원군이 임진왜란 때 불탄 광화문을 새로 짓는 과정에서 월대도 같이 지었다고 합니다. 일제 때 광화문 앞으로 전철이 놓이면서 월대도 훼철되어 이번에 복원한 것이죠. 월대에는 난간석이 둘러쳐 있었고 임금이 다니는 중앙계단 옆에 동물이 장식된 등석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월대에서 사라진 난간석과 등석의 일부가 발견되었습니다. 동구릉에 난간석의 일부와 입 벌린 용이 조각된 용등석(용두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등석의 앞부분에 해당되는 해치(?)등석이 용인 호암미술관 야외전시실에 놓여 있습니다. 복원된 월대를 보면 원래 월대에 있었던 돌과 새로 만든 돌이 뒤섞여 있는 걸 쉽게
정조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중화척(中和尺) 뱀은 정체가 좀 미묘하다. 해석하기도 좀 어렵다. 올 을사년은 푸른 뱀의 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문수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36가지 모습으로 변한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청사[靑蛇, 푸른 뱀]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박혁거세의 능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 뱀릉)이라고 한다. 박혁거세의 몸이 하늘로 올라가다 땅으로 떨어져 5갈래로 나뉘어졌다. 사람들이 하나로 모으려 했는데 뱀이 나타나 모으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오릉이 되었고 사릉이 되었다. 경문왕의 침전에는 항상 뱀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궁인들이 놀라고 두려워서 쫒아 내려고 하자 왕이 그만두게 하였다. 자신은 뱀이 없으면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경문왕이 잘 때는 뱀이 온몸에 올라와 혀를 내밀고 있었다고 한다. 둘 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얘기지만 왜 뱀이 나타나 박혁거세의 몸을 다섯으로 나눴는지, 왜 경문왕이 뱀들과 함께 잤는지는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다. 새해는 항상 기대와 희망으로 들뜨기 마련이다. 그런데 올해 뱀해는 좀 남다르다. 새해 기분이 별로 나지 않는다. 왜일까. 아마도 지난해 12월 일으켰던 비상계엄으로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26] 삭제 될 뻔한 ‘홍익인간’을 위한 변명 우리의 교육이념은 ‘홍익인간’입니다.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죠. 간혹 인간세상이 인간으로 잘못 번역되기도 합니다. ‘홍익인’은 홍익하는 대상이 ‘사람’에 한정적이라면 ‘홍익인간’은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을 포함한 포괄적 의미입니다. 최근 국회에서 교육이념 홍익인간을 삭제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반대에 부딪쳐 법안을 접었지만 언제 또 제기될지 모르죠. 그런데 홍익인간 삭제 시도에 대해 역사학계를 포함하여 반대 목소리가 높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교육이념은 보편적 의미를 담아야 하는데 고조선의 단군신화는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것이죠.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도 불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보편적 교육이념에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이 밑에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홍익인간 자체만 본다면 불교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불경에 홍익인간이란 단어 조합은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홍익중생’ 또는 ‘이익인간’이란 용례는 보입니다. 유교의 대표 경전인《논어》에는 ‘홍인(弘人)’, ‘홍도(弘道)’가 보이며 실학자 정제두의 글 속에‘홍익’이란 글귀도 있습니다. 홍익인간을 불교적 윤색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34]나를 되찾는 한 해가 되었으면 과거를 되돌아보면 과연 나대로 살아왔나 반성해 봅니다. 내가 기준이기보다는 남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에 기준을 두고 살아오지는 않았나 생각해 보지요.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면 나는 없어지고 주변에서 만들어 준 나가 진짜 나인 줄 알게 됩니다. 우리 역사에도 그런 일이 수차례 벌어졌습니다. 우리 역사가 기준이 아니라 중국 역사가 기준이었고 중국 기준에 맞을 때 가치가 있다고 여겼답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직접 나서서 중국 기준에 맞추려고 하였지요. 그럼 역사를 통해 한 번 살펴볼까요? 첫째, 고조선의 마지막 왕은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입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을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라 했어요. 위만은 준왕을 몰아낸 찬탈 군주라고 하여 위만조선을 정식 왕조로 인정하지 않았지요. 우리는 조선시대까지 위만조선의 역사 대신 중국 기자조선의 역사를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정통으로 인정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위만조선을 인정하고 있답니다. 둘째, 고구려 연개소문의 성씨는 연씨이고 이름은 개소문입니다. 그런데 당태종의 아버지 이연과 한자가 같다고 하여 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