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건물 그려보고 싶다!!” 그림을 배우다 보면 다양한 소재를 그려보게 됩니다. 그 중 그림을 포기할까 하게 만든 것이 바로 건물이었습니다. 공간 지각력이 부족한 편이라 주차를 배울 때도 애를 먹었던 사람이기에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건물의 두께, 거리에 대한 이해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결국 두세 번 정도 건물을 그리고 실망하는 마음에 더 이상 그리지 않았습니다. 몇 시간 동안 힘겹게 그린 그림이 만족스럽지 않으니 저의 부족함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노력하는 동안 행복하지 않은 작업을 피해버리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대신 자연물을 계속 그렸습니다. 두 번의 작은 전시회를 열면서 저는 두 번 모두 꽃과 나비 등 자연물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워낙 꽃을 좋아하기도 하고 잘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 편안한 마음이 드는 소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화려한 모란을 그리면서도 유럽의 웅장한 건물 그림을 슬쩍슬쩍 쳐다보며 마음 한구석에 남는 미련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포기했던 건물 그림에 대한 아쉬움이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마카 드로잉’을 시작한지 4년. 계속된 미련과 아쉬움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음에 들
[다문화, 너와 나의 이웃이야기 1] 라이따이한 사랑 ‘라이따이한’은 대한민국이 1964년부터 참전한 베트남 전쟁에서 대한민국 국군 병사와 현지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2세를 뜻합니다. 한국군의 철수와 그 후의 남베트남 정부의 붕괴 속에서 라이따이한은 ‘적군의 아이’로 차별받았습니다. 단어 ‘라이따이한’에서 ‘라이’는 베트남에서 경멸의 의미를 포함한 ‘잡종’을 뜻하며, ‘따이한’은 ‘대한’을 베트남어식으로 읽은 것입니다. 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인간에 대한 절망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간혹 그 속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탄생시키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 전쟁 속의 아름다운 이야기와 다문화 사랑을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다문화가정 아이들과 중도입국청소년들이 다니는 토요학교에 한 베트남 여성이 13살 된 딸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딸아이는 베트남에서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치고 입국하여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적응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적응을 위한 시간을 갖고자 학교는 6학년이 아닌 5학년으로 하향편입을 했습니다. 곧 중학교에 들어갈 준비도 해야 했기에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집중적으로 학습하기 위해 센터를 찾은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32] 나라이름 ‘고려’와 영문표기 나라 이름 ‘고려’는 태조 왕건이 세운 나라의 이름이다. 우리나라의 Korea란 영문국호도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란 나라 이름은 태조 왕건이 맨 처음 사용한 나라 이름이 아니다. 후삼국의 궁예가 먼저 사용한 나라 이름이다. 궁예는 처음 고려란 나라 이름으로 시작해서 이후 마진, 태봉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런데 궁예의 고려도 궁예가 처음 사용한 나라 이름이 아니었다. 고구려가 4~5세기 평양천도를 전후하여 나라 이름을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국호변경까지는 아니지만 4~5세기 고구려는 고려란 나라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고려란 나라 이름을 주로 사용했다. 정리하면 고구려가 고려로 나라 이름을 바꾼 이후 궁예와 왕건 모두 ‘고려’란 나라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또 Korea란 영문 국호의 유래도 왕건의 고려가 아닌 고구려의 고려까지 앞당길 수 있다. 현 한국사 교과서는 주몽, 궁예, 왕건이 세운 나라 이름을 고구려, 후고구려, 고려라 하고 있다. 일반 한국사 개설서도 마찬가지다. 현 고구려-후고구려- 고려로 이어지는 계승관계를 통해서는 고구려가 ‘고려’로
[친환경 목장 농도팜 스토리] 자연이 함께 어우러진 가장 아름다운 목장으로 선정된 친환경 목장 ‘농 도 원’ ‘농 도 원’의 역사 농 도 원은 원래 ‘복음농도원’이라는 이름으로 1952년 6.25 전쟁 중에 설립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농장 중 하나입니다. 한때 농장내의 ‘복음농도원’이라는 농업학교를 통해 수많은 농촌지도자와 ‘가나안농군학교’를 탄생시킨 한국 농촌운동의 산실이기도 하죠. 농도원 출신인 ‘유태영’ 박사는 1960년대 새마을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세우고, 그 당시 우리나라가 너무 헐벗고 가난했기에 식량의 자주권을 우리 스스로 가져야겠다는 뜻을 정하고, 시골의 젊은 영농후계자를 육성하려 하셨죠. 한편 저희 아버님은 농장이 경제성장력 있는 산업화된 시설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농도원은 1973년부터 홀스타인 젖소를 기르고 우유를 생산하는 정통 낙농목장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제가 1990년 물려받아 ‘농도원’으로 이어가고 있지요. 화이트 칼라에서 목장 주인으로 처음 아버님께서 “이 일을 해봐라” 했을 때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어요. 서울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회사에 다니며 삽질 한 번 떠보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아버님은 동물과 자연을
[손미정의 문화·예술 뒷이야기 3] 완벽주의자들의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하여 세계적인 교향악단들의 내한 공연을 보거나 유명 음악가들의 평전을 보면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에 있어서 ‘완벽’을 추구했던 음악가들이 많았다. 20세기 거장들의 음악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지휘자 ‘카라얀’인데, 그의 화려했던 예술 인생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인물은 ‘세르지우 첼리비다케’(Sergiu Cellibidache)이다. 첼리비다케는 카라얀과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 활동하면서도 그와는 달리 철저히 상업성을 거부했던 음악가였다. 카라얀은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와 상업화에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부와 명예를 함께 움켜쥔 화려한 음악 인생을 누린 반면 첼리비다케는 ‘지휘계의 기인 ’혹은‘이단자’로 불렸다. 토스카니니처럼 암보로 지휘하는 것은 기본이고 광적인 카리스마로 오케스트라를 휘어잡았다. 수십 번의 리허설을 통한 혹독한 연습으로 완벽을 추구했고 어떠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독설가로 유명한 첼리비다케는 다른 지휘자들을 거침없이 비판했다고 한다. 카라얀에 대해서 는‘젊은 음악가에게 심각한 독이 될 수 있는 본보기’라고 했고, 로린 마젤에 대해서는 ‘칸트를 읽는
“새~들에게 물어봐!” 우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비록 오랜 시간 인류가 5대양 6대주의 정복자로 명성을 쌓아왔다 할지라도, 그것은 ‘2차원적 평면운동’(대상: 땅과 바다)에 불과합니다. 지난 500년 동안 서양은 땅을 중심으로 한 ‘대륙문화’를 떠나, 더 광활하고 위험한 대양을 터전 삼아 ‘해양문화’를 이뤄갔지만, ‘2차원’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인간이 비행기를 만들어 익숙한 평면을 떠나 ‘3차원의 입체운동’(대상: 하늘)을 시작한 건 100여 년이 채 안 되는 20세기입니다. 이제 인류는 이런 짧은 ‘항공문화’의 시간을 뒤로하고, 완전히 새로운 ‘4차원적 우주운동’(대상: 우주)의 ‘우주문화’를 이루어야 할 시점에 놓였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지구의 중력을 완전히 벗어나, 무중력과 다양한 중력들을 가진 우주에서 이룰 삶의 예비단계로서의 ‘3차원적 삶의 방식’을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이런 가운데 우주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하늘을 나는 것이 일상인 삶을 살아온 새들이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는 것은 3차원적 삶이라도 제대로 배워야 할 우리에게 있어 놀라운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우주를 향했던 눈을 조금 낮추
이순신의 통영, 통영의 이순신 김한민 감독의 영화 <한산 : 용의 출현>이 한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 한산대첩의 현장인 통영에 다녀왔다. 통영이 초행은 아니었지만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난 직후였기에 감흥이 새로웠다. 통영은 이순신의 고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통영(統營)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의 줄임말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은 한산대첩 이듬해인 1593년 신설됐다. 충청과 전라, 경상도의 수군을 총괄할 각 수영(水營)의 상급 지휘부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산대첩 당시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로서 이억기의 전라우수영과 원균의 경상우수영 수군들을 아울러 지휘했다. 이순신 장군은 연합함대의 사령관격이었지만 이억기와 원균은 장군의 부하가 아닌 수평관계의 장수였다. 지휘체계의 결함이 불가피했다. 통제영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기관으로 1895년까지 존속했던 조선 수군의 총본부였다. 통제사는 종2품 관직으로 팔도의 도백(道伯)인 관찰사(觀察使)와 동급이었다. 외직으로는 최고위급이다. 역대 통제사는 모두 208명이었다. 초대 통제사는 한산대첩의 주역, 이순신 장군이 임명됐다. 통제사는 한산도에 통제영을 설치했다. 통제영이 지금의 자
엄마, 병아리를 키우면 안 될까요? 유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손에 노랑 병아리 한 마리를 들고 왔다. 우리도 어릴 적에 학교 앞에서 노랑 병아리를 보곤 했는데, 아직도 그런 일이 있나 싶어 의아해 하면서 “병아리는 왜 데리고 왔어?”라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학교 앞에서 샀던 병아리를 키워 닭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작은 두 손으로 병아리를 조심스레 싸안고 온 유진이를 보자마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병아리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느껴지는 무심한 말투와 목소리 톤이 좀 높아진 소리에 유진이가 더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사실은 작은 병아리라고 해서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희미하게 꺼져가는 촛불과 같은 생명이라고 여겨져서 애잔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레 병아리를 살피면서 생사부터 확인을 해야 했다. “병아리가 살아 있기는 살아 있어?” “네, 살아 있어요. 삐약 삐약 소리를 내기도 해요.”라면서 병아리를 데리고 온 사연을 들려주었다. 친구인 지수가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샀다고 했다. 한 마리만 사려고 했는데, 한 마리 값으로 두 마리를 주었다고
[다문화, 너와 나의 이웃이야기 4] 다문화가정 대학 진학률, 40.5% 한국 학생 진학률 71.5%에 비해 현저히 낮아 지난 6월 말 여성가족부는 ‘2021년 전국다문화가족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전국 1만5천여 다문화 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다문화가정 자녀의 대학 진학률은 40.5%로 한국 학생의 진학률인 71.5%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만 15세 이상 다문화가정 자녀의 비재학, 비취업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and Training - 학업도 하지 않고 일도 하지 않으며 취업을 위한 훈련도 받지 않는 젊은이를 지칭) 상태의 비율은 14%로 집계되었죠. 여가부는 다문화가정 자녀의 낮은 진학률의 원인으로 부모의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 입시 정보의 부족, 한국 학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사교육 수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교육에 있어 부모의 관심과 역할, 지원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혼이민자의 경우, 세월이 지나 자녀가 초등학생, 중학생이 되어도 여전히 한국어가 미숙하고 한국 사회의 시스템을 어려워하
[다문화, 너와 나의 이웃이야기 2] 다문화사회전문가가 되려면 다년간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각종 지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저출산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인구유출과 인구절벽의 현안에 고민하는 지자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출산, 고령화로 앞당겨진 다문화사회와 노인사회에 대한 국가적 대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고 이제는 개인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비해야 할 때가 되었죠. 이에 대한 대안은 몇 개나 될까요? ‘외국인정책은 인구정책이다’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출산율의 증가입니다. 산아제한정책에 익숙했던 우리는 곧장 출산장려정책으로 돌아섰고, 지금도 10년 간 150조 원을 쏟아 붓지만 결과는 더한 감소세이죠. 이에 이민자를 받아들여 생산인구를 늘이고,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외국인정책은 인구정책이다’입이다. 이렇게 도입하기 시작한 국내 체류 외국인 비율은 2016년 전체 인구 대비 3.96%에서 2019년 4.87%(252만 명)로 매년 증가하다가 코로나로 인해 국경이 봉쇄되어 2년간 입출국이 제한되다 보니 2020년에는 3.93%(196만 명)로 하락세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 현상으로 일상이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