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남한산성 답사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지 4년째인 정조 3년(1779) 8월 3일부터 10일까지 7박 8일 동안 답사(?)를 떠났다. 답사를 떠나는 첫째 이유는 여주의 한 곳을 특별히 들릴 목적이었다. 정조는 여주에 행차하여 신하들과 세종릉[英陵, 영릉], 효종릉[寧陵 영릉], 보은사[신륵사], 청심루[송시열] 등에 관한 말을 나눴다. 이 가운데 어느 곳이 답사의 첫째 이유였을까. 지금은 여주하면 세종대왕릉과 신륵사가 대표적인 명소이지만 정조의 나들이 목적은 효종릉 참배였다. 1779년은 효종이 서거한지 120주년 되는 해였다. 지금은 1백 주년, 2백 주년이 큰 기념일이지만 예전에는 60년, 120년 등 60주기가 의미 있는 기념일이었다. 정조가 효종릉을 찾은 것은 인조-효종-현종-숙종-영조-정조로 이어지는 왕통의 정당성과 인조반정의 대의명분이었던 사대주의 ‘존명배청’ (尊明排淸)의 확인 작업이었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함께 봉림대군[효종]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 나중에 돌아와 소현세자 대신 조선의 왕이 된 효종은 지난날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를 물리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정조는 영릉을 참배하러 가
세계최초의 해양탐사선 챌린저호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 영국은 막강한 해군력으로 해상 패권국가가 되었습니다. 바다를 운명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바다에 대한 깊은 관심과 끊임없는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전 세계 해양 패권과 무역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한 힘과 함께 기술력과 정보력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해양 탐사를 최초로 시작한 나라가 영국입니다. 17세기 이후, 항해술의 발달로 바다에 관한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868년에는 톰슨과 런던대학 교수인 카펜터가 해저300m 보다 깊은 바다의 해양 생물채집과 해저 생태계 연구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이후로 해양 생물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이러한 연구 성과의 기초위에 챌린저호의 탐사가 시작 되었습니다. 이 탐사로 해양학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는데, 그 최초의 해양탐사선이 HMS 챌린저호입니다. A. 해양 연구의 기초 1) 영국인 최초 프랜시스 드레이크경(Sir Francis Draco, 1540~1596)의 세계일주 해적, 군인, 탐험가로서 영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했습니다. 물론 그보다 훨씬 전에 포르투갈 출신의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
가르치는 즐거움을 선사한 10반 꽃봉오리들에게 “어느 순간부터 학교를 옮기면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나? 그것부터 살피게 되었네.” 나를 아끼던 교장선생님께서 당신의 경험담을 말씀하시며,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승진 준비를 해놓으라고 조언하시던 게 생각나는구나. 더 나이 먹으면 학생들도 꺼릴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말씀이셨지. 선생님도 이번에 학교를 옮기면서 이 말씀이 쟁쟁했단다. 나를 반기지 않으면 어쩌나, 익숙하지 않은 업무를 맡아 쩔쩔매면 또 어쩌나, 한걱정이었지. 이십 년만 근무하면 그 다음부터는 ‘덤’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그에 따라 요구하는 삶의 무게도 보태져 꾸역꾸역 일을 헤쳐나가야 해서, 선뜻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단다. ‘덤’마저도 더 달라고 보채는 형국이었지. 그리고 너희를 만났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고, 사소한 이야기도 크게 공감하는 너희를 보면서 이것이 하룻밤 꿈이면 어쩌나 밤잠을 설쳤단다. 어느 날은 나보다 더 나이가 많으신 선생님이 부임했다고 하면서 내가 맡은 과목과 업무를 다른 분이 맡아야 하니 내놓으라는 꿈까지 꿨단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내가 얼마나 너희를 가르치는 일에
소방관의 희생, 그 유가족의 아픔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팀장님, 수동아, 우찬아!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뜨겁지 않은 세상에서 편히 쉬시라…” 지난 1월 8일 경기도 평택시 냉동창고 신축공사장에서 인명 수색을 위해 투입됐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송탄소방서 구조대원 3명의 영결식장에서 동료 구조대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고별사를 읽었습니다. 고인들에게는 1계급 특진과 옥조근정훈장이 추서됐습니다. 유해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답니다. 유가족들의 오열과 소방관들의 동료를 잃은 애통함이 영결식장에 참석한 이들에게 깊은 슬픔으로 남았지요. 최근 10년간 화재진압이나 구조·구급 활동 중 순직한 소방관은 총 49명에 이릅니다. 1년에 약 5명이 순직하는 셈이지요. 특히 지난해 6월 쿠팡 물류센터 화재로 소방관 순직사고가 발생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또 불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연이은 동료의 순직은 소방관들에게 트라우마의 상처를 덧나게 했답니다. 소방관에게 순직은 어쩌면 소방관에게 희생정신으로 어깨 위에 드리워진 운명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미국은 10월 첫 주가 ‘전국 소방관 추모기간’입니다. 대통령 부부가 소방관 유족을 초청해 위로하는
수리산이 나는 좋더라 제가 살고 있는 군포는 크기 면에서 전국에서 가장 작은 시 중에 하나이지요. 이 도시로 14년 전에 이사와 지금까지 살아온 저에게 누군가 “군포는 뭐가 좋아요?”라고 묻는다면 지체 없이 이렇게 말할 거예요. “우리는 수리산이 제일 좋아요”라고요. 사실 어딜 가나 산 밖에 없는 강원도 산골에서 자란 저에게 처음부터 수리산이 그렇게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죠. 하지만 도시 생활이 깊어질수록 수리산은 매력을 넘어 저에게 너무나 고마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물론 수리산 속에서 꾸준한 운동(달리기와 자전거)과 등산, 산책을 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도시 아주 가까이서 사람들을 이렇게 넉넉하게 안아주는 산은 드물지 않을까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리산이 왜 좋은지 이야기해야 하는데, 조금 색다른 면을 말해 보려 합니다. 바로 ‘수리산의 어둠’이지요. 새벽어둠_청각과 후각, 공간감의 놀라운 확장 새벽녘 날이 밝아오기 전, 수리산 바로 아래 자리 잡은 납덕골 계곡에 들어찬 어둠을 뚫고 달려보신 적이 있나요? 자전거로도 좋고요. 띄엄띄엄 놓인 가로등 불빛, 그마저도 없는 길을 달리다 보면 청각과 후각이 아주 예민해 집니다. 주변 풍경이 어둠에 지워진 공간속에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30] 활을 쏴라, 겉모습만 스님이다! 고려시대 일연 스님이 편찬한《삼국유사》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진성여왕(?)의 막내아들 양패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바다의 해적들이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활을 잘 쏘는 궁사 50명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배가 곡도(백령도)에 이르렀을 때 풍랑이 며칠간 크게 일어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사람을 시켜 점을 쳐보았더니 이 섬의 신령스런 못에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활 잘 쏘는 한 사람을 남겨놓고 가면 풍랑이 멈추고 순풍이 불 거라고 하였다. 50명의 궁사들은 제비로 남을 사람을 정하기로 했다. 나무에 자기 이름을 써서 물에 띄어서 가라앉는 사람이 남기로 했다. 당연히 모두 물 위에 뜨겠지 생각했는데 신기하게 ‘거타지’란 이름을 적은 나무만이 물속에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거타지를 남겨놓고 떠나니 바람이 순풍으로 바뀌었다. 거타지는 앞으로 이 섬에서 어떻게 지낼까 근신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나는 서쪽 바다의 신, 해약이요. 그런데 매일 어떤 중이 해가 뜰 때면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주문)를 외운다오. 그럼 우리 부부와 우리 자손들이 물속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너와 나의 이웃으로- 군포이주와 다문화센터 - 경남 김해 ‘장유’, 첫걸음을 내딛다 1996년. 경남 김해시 ‘장유’에서 만난 외국인 근로자들은 대부분 산업연수생이었습니다. 당시는 외국인력 관련법이나 제도, 정책이 수립되기 전이었고, 관련기관들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연수생이라 한 달 평균 월급이 30만 원대로 매우 적었고, 한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해 많은 무시와 차별, 욕설, 폭행 등을 당해도 무조건 참고 견뎌야 했죠. 또 회사를 뛰쳐나오면 불법체류자가 되니 그런 점을 이용해서 착취하는 악덕업자들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주변상황은 이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관심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어요. 이후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낯선 이들에게 억울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한국인 사장님께 당부하는 일을 시작으로 한국어도 가르쳐주고, 한국문화도 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관련법이나 정책 및 제도가 건전하게 잘 수립될 수 있도록 대정부활동도 하기 시작했죠. 준비되지 않은 채 갑자기 시작된 다문화 사회 88올림픽 전후로 시작된 건설 붐과 더불어 92년 중국과의 수교가 재개되면서 많은 동포들이 들어왔어요. 국가개발을 위한 인력수급이 필요했던 상황
한옥 유진하우스에서 에스토니아인들과 금(金), 금치체험을! “Tere päevast! (테레 파바스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인사말 “어서오세요! 유진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처음 만나면“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하는데, 한 번 해볼까요?”했더니, 모두들 서투른 발음으로 안녕하세요?를 제각각의 억양으로 말한다. 그래도 잘 했다고 칭찬을 해 드렸다. 그럼 “에스토니아어로는 어떻게 말하나요?” 물었더니, “Tere päevast! (테레 파바스트!)” 라고 한다. 아이구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인사말이었다. 어슬프게 따라 했더니 다시 발음을 한 번 하신다. 그들의 귀에 거슬리는 발음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다른 나라 사람들의 간단한 인사를 따라하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다. 말을 배우는 것은 단순히 단어 몇 마디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배워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여행을 온 분들이 한국 음식에 관심을 가져주다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우린 김치 안 먹고 살아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인 김치가 코로나를 겪으면서 세계 사람들에게 더 인기가 많아졌다. 그런데 우리는 외국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일본 학교 앞에는 왜 분식점이 없을까? 학창 시절 추억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새삼 생각해 보았습니다. 분식점과 도서관이 금방 떠오르더군요. 그런데 일본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좀 놀랐던 것은 학교 앞에 분식점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학교 내의 매점도 존재하지 않죠. 특히 학교에는 돈과 시계 등을 가지고 가면 안 됩니다. 즉 귀중품을 소지하지 못하고 개인 소지품 또한 가져가면 안 되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빈부 격차로 인해 아이들이 힘들어 할 수도 있는 정서를 고려한 것이라는 겁니다. 심지어 교과서도 교실에 절대 놓고 다니면 안 되었지요. 그래서 아이들은 총 11kg나 되는 가방(여행가방 사이즈)을 매일 들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 이유 또한 학교에 놓고 다니면 도난사고나 다른 아이들이 자기 물건에 낙서하고, 물건을 빼앗으며 놀리는 이지매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랍니다. 이렇듯 돈을 가지고 다니지 못 하니 학교 근처에 분식점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거리에서 손에 먹을 것을 들고 걸어 다니는 것 또한 허락되질 않았습니다. 위생상 좋지 않다는 것이죠. 일본의 학부모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당연한 것처럼 생각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초·중
남해안 문화·역사 기행 단상 ① 국립 부산 과학관 ② UN기념공원 ③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박물관 ④ 조선통신사역사관 ⑤ 국립해양박물관 ⑥ 자갈치시장 ⑦ 국제시장 ⑧ 차이나타운, 텍사스거리 ⑨ 을숙도 생태공원 5박 6일 남해안 여행! 저는 처음으로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2009년 네팔에서 온 후, 2017년 한국에 귀화해 한국인이 되었지만 한국 역사는 잘 몰랐어요. 이번 여행에서 이순신 장군이 우리나라를 지켰던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역사와 관련된 영화를 봐도 아무것도 몰라서 그냥 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역사박물관, 옛날에 전쟁 했던 장소를 직접 가서 보고, 제 옆에서 5박6일 동안 같이 간 사람들이 계속 설명을 해주어 남해군 이순신 순국공원 안에 있는 이순신 영상관에서 노량해전 영상을 보며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조상님들이 우리나라를 살려주셔서 너무너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더 노력을 해서 더 강한 나라를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번 여행은 정말 좋았습니다. 군포시 금정동 김혜영 ‘코리아노사우루스 보성엔시스’오잉? 뭔 이런 촌스럽고 이상한 공룡이름이 다 있나? 전남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