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 보따리 어릴 적부터 내 기억 속 할머니의 집은 지저분한 창고였다. 물건을 못 버리고, 내다 버려진 것들을 거친 손으로 보따리에 양손 한가득 주어 오시는 할머니 때문에 집은 항상 쓸모없는 짐이 가득했고, 제각각의 물건들이 집안을 채워 누가 집의 주인인지 모를 정도로 불필요하게 많은 공간을 차지했다. 그 낡고 오래된 짐들과 쓰지도 못하고 아까워 버리지도 못하는 성격에 집안은 항상 난리가 났고 바퀴벌레, 알, 날파리 등 각종 벌레들이 좋아할 아주 안락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집안을 들어설 때부터 풍기는 꼬릿한 냄새부터 앉기도 버겁게 좁은 공간, 유통기한이 지난 상한 음식,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식기들, 겁도 없이 바닥을 기어 댕기는 바퀴벌레들에 잔뜩 긴장하며 집안에 들어서 소파에만 앉아있거나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한 적이 있다. 또한 손녀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에 음식을 주시는 것을 더럽다고 마다하며 못된 생각을 한 적도 많은 것 같다. 얼마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생전 좋아하시던 소주병을 치우며 짐을 하나씩 정리해나갔다. 정리하다 보니 오래되어 다 뜯어진 벽지와 곰팡이가 잔뜩 퍼져있는 욕조, 잡동사니로 가득한 화장실 등 도저히 사람이 살 수
피아노협주곡(Op.7)을 통해 클라라 슈만, 새롭게 이해하기 지난 9월 27일 저녁, 광장 한 편을 빨간 홍시로 불 밝힌 예술의전당 콘서트 홀에서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라는 주제로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이번 연주회 프로그램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세 음악가 각각이 작곡한 피아노협주곡을 모아놓았다는 것이었어요. 세 명 모두 당대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의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이었던 만큼, 각각의 음악적 특징을 비교해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연주가 작곡된 연도순을 따라 클라라(1834), 슈만(1841), 브람스(1858)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제목은 슈만과 클라라, 브람스의 순서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클라라가 슈만의 아내였기 때문에 슈만 뒤에 둔 것일 수도 있지만, 슈만과 브람스라는 음악계의 두 큰 거장 사이에서 클라라는 어떤 존재인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번호에서는 클라라의 피아노 협주곡을 통해 클라라와 두 음악가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클라라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Op. 7)의 특징 악장의 구분없이 이어지는 피아노 협주곡: 클라라가 단순한 피아노곡이 아닌 오케스
[한현석의 야생초 이야기 12] 수선화(Narcissus) 바람은 여전히 차갑게 느껴지지만 봄은 앞산 너머까지 와 있을 듯합니다. 겨울에 내린 눈은 수식어도 붙지 않고 눈이라고 표현하지만,'' 이맘때 쯤 내리는 눈은 춘설(春雪)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분명 봄이 가까이 와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양지바른 화단이나 정원의 한쪽을 살펴보면 차가운 계절임에도 수줍음을 참아가며 다소곳하게 꽃이 핀 수선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춘설을 이고 진 수선화를 만난다면 겨울이 지나간 것이 확인되면서 가슴이 뛸지도 모릅니다. 긴 겨울의 지루함과 추위에 몸이 움츠러들어 힘을 쓰지 못하던 것도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수선화'(水仙花)는 한자로 이루어진 이름입니다. 옛 어른들은 하늘에는 '천선'(天仙)이 있고 땅에는 '지선'(地仙)이 있고 물에는 '수선'(水仙)이 있다고 했다네요. 그만큼 이른 봄에 꽃을 피워 사람들에게 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수선화'를 사랑스런 마음으로 가꾸고 바라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정원이 딸려 있거나 작은 꽃밭이 있는 전원생활을 한다면 돌아오는 봄에 수선화 구근을 몇 개 구입해서 양지바른 장소에
"휴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고등학교 시절, 방학이 다가오는 어느 여름날 엄마에게 여름휴가에 대해 물었다. 엄마는 휴가라는 단어가 애초에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래서 더 자세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재차 물었다. 괜히 물어보았다. 휴가 같은 소리 한다는 핀잔만 들었다. 같은 반 친구 주연이가 강릉으로 여름휴가를 간다면서 나에게 “경혜, 너는 어디 가?” 라고 물은 것이 화근이었다. “글쎄…” 라며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과연 우리가 여름휴가라는 걸 간 적이 있었던가? 생각하게 되었다. 고등학생 나이로 약간의 눈치는 있었던지라 천진난만하게 계속 묻지는 못했다. 그래서 차근차근 말했던 건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나니 약간 서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더 조르지는 못했다. 놀러 갈 형편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그때 아빠는 농부이면서 목수였다. 농부가 쉴 때는 목수로 일했고, 목수 일이 없을 때는 농사를 지었다. 시간의 빈틈없이 사는 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농부의 아내이자 목수의 아내였으니 바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니 애들 데리고 놀러 갈 틈이 있을 리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 했으니
[한국 속의 세계인] 편리한 한국 친절한 한국 한국에서 산 지 5년이 된 베트남 새댁, 응옥입니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저는 한국이 너무 친근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은 베트남에서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수년 전부터 한국 드라마는 베트남의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에게 특히 주부들과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케이팝이 뜨면서 한국의 BTS가 젊은이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고, 심지어 한국 가수와 배우들이 우상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저 또한 한국이 익숙해졌고, 자연스럽게 한국에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에 녹아 있는 한국 문화 때문인지 한국의 유학길에 두려움은 없었어요. 그렇게 한국의 대학원을 지원하게 되었고 지금은 같은 베트남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직장 내 한국과 베트남의 너무 다른 호칭 한국의 직장 문화는 베트남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사람들을 부르는 호칭에 있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Mr/Ms. 누구라고 이름을 부르거나 종종 완전한 이름을 부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직위로 서로를 부르더군요. 한국에서 저의 친절한 친구가 저에게 이것을 지적해 주지 않았다면 저
딸의 소리를 찾아서… 목포까지 시나브로 겨울에 들어섰다. 기온은 점점 낮아지고 마리나는 동파를 방지하기 위해 12월부터 2월까지 수도를 잠근다. 배들 위로 눈과 먼지가 엉겨 붙고 날이 더 추워져 1월쯤 한강이 얼어붙으면 언 강을 망치로 깨며 배를 보호하기 위한 선장들의 눈물겨운 겨울살이? 들이 시작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많은 변화가 있던 한 해였다. 할아버지 칠순 잔치 때 많은 관객들 앞에서 차분히 취미로 배운 흥보가를 부르는 딸아이의 재능을 발견하고는 진짜 소리, 옛날 소리를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할머니 명창 선생님을 찾아 남도로 유학을 왔다. 똥 삭힌 물을 마시고 온종일 산과 폭포를 찾아다니며 득음을 하시던 시절의 명창 분들은 이제 많이 돌아가셔서, 공력이 있는 옛 소리를 들으며 배울 곳을 찾기 어려웠다. 유튜브와 여러 영상 자료들을 뒤져가며 생존해 계신 많은 명창 분들의 소리를 찾아 들었고 감정과 공력이 좋은 딸아이의 특성을 잘 살려주실 명창 분을 찾아 서울에서 땅 끝 목포까지 유학을 온 것이다. 문화재 할머니 명창 앞에서 도제식으로 배우는 판소리는 태어나 처음으로 강한 압박을 견뎌야 하는 열 살 아이에게는 쉽지 않은 과정이라 곁에서 이를
엄마와 다시 쓰는 일기장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골집에 혼자 계시던 친정 엄마는 2018년 봄에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발견되었습니다. 왼쪽 편마비가 왔습니다. 저는 그 당시 뉴욕에 있었습니다. 엄마는 종합병원에서 거의 1년을 치료하고 재활하셨고, 동생 집에서 6개월을 생활하다가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엄마랑 전화 통화할 때마다 “집에 가고 싶다. 누가 나를 집에 데려다 주면 좋겠다. 나를 여기서 나가게 해다오”라고 하셨습니다. 엄마의 부탁은 시간이 지날수록 간절함에서 애원으로, 절규로 변했습니다. 2021년 7월! 7년 만에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한국, 고향 땅이었습니다. 과거를 허물다 오자마자 가장 먼저 100년이 된 시골 흙집,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을 부수고 고쳤습니다. 오래 묵은 짐들을 버리고 정리하는데만 무더운 여름 내내 한 달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구조, 엄마가 생활하시기에 더 안락한 환경의 집을 지었습니다. 엄마의 현실을 대면하다 요양병원의 복잡한 퇴원 절차를 거쳐 엄마를 집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엄마의 재활에 대해
빠르게 변하는 이 시대∼ 먼저 ‘다양성’을 인정해보자! 주말 아침 느지막하게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지난 한 주 내가 본 공연들 중에서 인상 깊었던 공연을 복기해 보는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공연의 제목은 <만병통치약>. 제목만 들어도 속이 시원해지는 공연이었다. 출연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무용가 안은미 씨와 젊은 소리꾼 서도가 함께 꾸미는 무대였다. 오프닝은 옛날 가수 신 카나리아 씨가 부른 ‘나는 열일곱’이라는 노래를 안은미씨가 립싱크로 부르며 시작되었다. “나는 가슴이 울렁거려요. 당신만 아세요. 열일곱 살이에요…” 객석을 채우고 있는 관객은 20대부터 60대 까지 다양했는데 일부 나이 드신 관객들은 따라 부르기도 하며 공연을 즐겼다. 그 후엔 서도밴드의 리드싱어 서도가 드랙 퀸 복장을 하고 나와서 80~90년대 유행했던 가요를 그의 창법으로 불렀고 안은미 무용단의 젊은 무용수들이 객석에서 관객들과 함께 춤을 추며 공연이 무르익었다. 생각해 보니 드랙을 소재로 한 콘텐츠들을 나는 꽤 많이 보아왔다. 뮤지컬 <킹키부츠>, <헤드윅>, 영화 <more or less>, 웹툰
24년 만에 개봉한이삿짐 속 추억의 공유 결국은 스타벅스에 앉아 추억에 젖다 변두리에 있는 집에서 시내 쪽으로 전철로 30분 가면 ‘싼 호아낀’역이 있다. 중간에 갈아타기 때문이지 실제로는 전철로 20분거리다. ‘San Joaquin’ 역에서 내리면 동쪽으로 카톨릭대학교가 있다. 정계진출을 하려면 반드시 필수적으로 나와야 한다는 칠레대학교가 명실공히 칠레 최고의 공립대학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립 카톨릭대학교가 칠레대학교를 앞지르고 있다.(칠레에도 명문대학교의 순위가 있다) 카톨릭대학교의 정문 바로 맞은편엔 스타벅스가 있다. 칠레라는 나라는 확신하건데 의외로 건전한 내가 재밌게 지낼만한 꺼리가 없다. 고작 우리 동네의 염소까페 아니면 던킨도넛츠점, 아님 30분 떨어져 있는 스타벅스… 스타벅스의 커피 Americano 작은 사이즈의 값은 3800페소다. 칠레의 시간당 최저임금은 한국의 최저임금의 3분의 1이기에 3800페소의 세배인 11400페소인 셈이다.(한국 돈으로 굳이 환산하자면 17100원) 이런 고급 커피숍이 카톨릭대학교 맞은편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카톨릭대학교의 위용, 그러니까 칠레의 빈부와 경제 전반에 걸친 사회구조를 쉽게 짐작할 수 있는